김은우 시인 / 그린란드
펭귄이 있고 북극곰이 있고 개가 있고 바다코끼리가 있고 바다표범이 있다
없는 기대와 실망이 둥둥 떠다니는 얼음뿐인 땅을 그린란드라 이름 붙인 아이러니 썰매개들이 얼음 대신 물속을 달린다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을 과감히 놓아주는 고립의 세계에 갇힌 이곳에선 모두가 외톨이
개랑 친해져서 개에게 고기 뼈도 던져주는 과거인 듯 미래인 듯 알 수 없는 시간
나를 닮은 누군가 있을 것 같아 두리번거려도 아무도 없다
어쩌자고 도착하기도 전에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건지
아름답고 선명한 오로가가 나타날 때 춥다고 말하는 입이 얼어버린다
귀 기울여보면 저 멀리서 바람소리인 듯 웃음소리인 듯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
발자국을 따라 침묵이 길어지는 길 곳곳에 백색으로 빛나는 슬픔
내리던 눈이 쉬었다 다시 내린다
-『열린시학』 2021-겨울(101)호
김은우 시인 / 네잎클로버를 찾는 동안
네잎클로버를 찾으려고 풀밭에서 허리를 굽히는 사이 토끼 한 마리가 지나갔다.
네잎클로버는 아무에게나 쉽게 발견되지 않음을 깨닫는 순간 토끼 두 마리가 지나갔다.
네잎클로버를 찾지 못해 일찌감치 포기하고 앉아 있는데 토끼 세 마리가 지나갔다.
네잎클로버를 찾느라 허비한 시간이 아까워 어쩔 줄 모르는 사이 토끼 네 마리가 지나갔다.
네잎클로버 생각을 떨쳐버리려 해도 수많은 네잎클로버들이 아른거리는 동안 토끼 다섯 마리가 지나갔다.
김은우 시인 / 결혼
누군가 구명조끼를 입혀주며 등을 세게 밀었다 손잡이만 놓지 않으면 위험하지 않습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곳 무방비한 채 밀려오고 쓸려가는 푸른 물결 속으로 들어갔다 스르르 미끄러지며 수상스키가 앞으로 나아갈 때 뒤돌아보니 모두들 나를 향해 손 흔들었다 웃음소리, 왁자함이 점점 멀어졌다 하얗게 삼킬듯 파도가 달려들었다 물살을 가로지르며 돌고래처럼 솟구치다 고꾸라졌다. 다가오고 떠나는 것들의 민낯이 햇살에 타올랐다 아슬아슬한 두려움이 앞을 가리고 몇 바퀴를 돌아도 그 자리 바다 한가운데 나는 작은 섬에 불과했다 적의를 품고 달려드는 파도 속에서 무너지다 일어서고 무너지다 일어서며 중요한 것을 두고 온 것처럼 ㅁ자꾸 뒤돌아봤다 함께 농담하던 사람들이 까마득해졌다 길을 잃고 헤매는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곳 읽히지 않는 항로를 읽어내며 환한 햇빛을 찾아 어둠을 뚫고 달릴 때 물빛이 어두워지다 밝아졌다
김은우 시인 / 불법체류
길고양이는 엄마가 없고 주소가 없고 모국어도 없지 맨발로 달리다 지치면 아무 데나 고개를 묻고 잠드는 난간을 오르내리며 굴러 떨어지는 그림자 시린 등을 기대고 싶은 눈알이 왈칵 붉어지는 저녁 호루라기 소리 고함 소리에 어깨를 흠칫 움츠리며 전봇대 뒤에도 숨고 벤치 아래에도 숨지 옆구리가 허전하고 배가 고픈 밤 지나온 기억을 지우며 기어오르는 담벼락 머리 위로 쏟아지는 세찬 빗줄기에 온몸이 다 젖지
-시집 『귀는 눈을 감았다』에서
김은우 시인 / 미끄럼틀
출발하는 순간 도착하는 길도 있다. 그곳의 끝은 쿵 소리가 나는 바닥 추락하기 위해 계단을 오르자 바람이 불고 모자가 날아갔다 두 발과 두 손이 나란히 출구를 향해 미끄러지면서 불안 미끄러지면서 침묵 미끄러지면서 안도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햇빛 바람 먼지 햇빛 바람 먼지 바닥에 닿기 직전 절정의 순간 우리가 환호하며 비명을 지르고 폭포수처럼 떨어질 때 금방 사라져버리는 담배연기처럼 고양이가 지나갔다 라일락 향기가 지나갔다 내가 너의 손을 잡을 때 혹은 너의 손을 놓칠 때
-시집 『귀는 눈을 감았다』에서
김은우 시인 / 귀는 눈을 감았다
귀가 무럭무럭 자랐다 햇살 쪽으로 자라는 귀는 환한 봄날 더욱 빛났다 비 오고 바람이 불면 빗소리와 바람이 전해주는 이야기는 흥을 더해주었다 태풍이 지나가고 가을이 찾아오자 귀는 살이 오르고 해바라기를 닮아 노랗게 익은 주근깨 가득한 야윈 얼굴을 덮었다 기대와 실망이 거듭되는 휘청거리는 하루 또 하루 너무 많은 소리를 들은 귀는 점점 말라갔다 패배한 자의 행색으로 얼굴에서 떨어져 가로수 사이를 나뒹굴었다 찬바람이 말라비틀어진 그를 끌고 다녔다 갈 곳 없는 새들이 뒤를 오종종 따라다녔다 고양이를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은 많았지만 구경꾼은 많지 않았다 귀는 마른 가지를 붙들고 건초처럼 말라갔다
-시집 『귀는 눈을 감았다』에서
김은우 시인 / 신기루 수요일엔 주말을 기다리고 주말엔 월요일을 기다려요
당신은 내가 읽은 가장 난해하고 신비로운 책 천천히 한 술 한 술 페이지를 떠먹는 하루가 열리고
허공이 비로소 풍경이 되기도 하는 무지개라든가 오로라를 당신이라 부르고 싶은 저녁 내게 없는 것 오지 않는 것만 생각해요
깊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곁에 없는 사람
온 곳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이곳은 처음 와보는 끝없는 해안
흩어지는 바람 속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할 때 기도가 기다리는 대답이라면 침묵은 견디는 물음일까요 웅성거리는 구름이 구름을 벗어나려는 순간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기이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하고 나면 부끄러워질지도 모르는 고백을 하고 이젠 슬픔 같은 건 다 잊은 표정으로
우리는 만나야 할 사람들이지만 악몽 같은 결별이라는 말이 철썩철썩 파도를 쳐요
햇빛에 반짝이는 모래처럼 시간의 물결 속으로 사람들이 사라진 해변에 혼잣말이 지워질 즈음
온 세상이 차곡차곡 폭설에 잠길 때 한 사람이 사라져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이곳에서 흐릿하거나 선명하게 함께 있지만 홀로 있는 -계간 『시와 세계』2021년 가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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