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란 시인 / 모래사면
내 가슴 속엔 어떤 비규정성의 경사가 있어
그건 지독히 강력하게 자기 원칙을 주장하지 날이면 날마다 자기 논리 안에서 강화되기만 하는
어느 날 뒤돌아보니 이미 늦은 거야 돌아갈 길이 지워졌어
뿌윰한 천사들 하나, 둘, 셋…… 하냥 부드럽게 그 위태위태한 물질과 비물질 이것과 저것 사이의 흔들리는 경계 비스듬한 모래 언덕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와
매혹, 불안한…… 그 기대지지 않는 희박한 언덕을 나는 천년 전부터인 듯이 바라보지
우울……또는…… 기이하고 막막한 슬픔
그것들은 도착하지 않고 하염없이 오기만 오기만 해
나는 가만히 내 살을 들추어봐 거기 차곡차곡 쟁여진 기다림, 자기 원칙 안에서 완결된, 그것으로 충분한, 기다림, 화안한……
김정란 시인 / 바람의 말을 알아듣고 싶어
난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빈 유리병 바닥에 떨어진 불수의(不隨意)의 공허 또는 갈망 감이 잡히지 않는 생명의 뒤에 숨어있는 기질 기질 성(聖) 기질
난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난 완전히 비어버리기를 바랬다 하느님, 떨면서 하느님, 난 바람이 스쳐지나가는 길 위에 서있는 작은 꽃잎사귀가 되고 싶었다
아주 조그만 깨어있는 꽃의 잎사귀 한개
바람이 불 때마다 내 마음속에 은가루처럼 떨어지는 당신의 말을 알아듣고 싶었다
내 몸의 섬모를 다 흔들어 나를 비우고 그 말로 내 몸을 가득 채우고 싶었다
땅바닥에 떨어져 깨져 버린 귀먹은 유리병 고통스러워하는 유리병인 나는
김정란 시인 / 가을
가을, 나는 문득 죽음을 알아 버리지
바람, 난 문득 알아 버리지, 신비한 부서짐, 비스듬히 내 삶의 한 귀퉁이를 어딘가로, 나 알지 못하는,
곳.......... 있지만 없는......... 장소의 귀신들에게로 끌어당기는 것
가슴속엔 웬 수많은 목소리들, 속삭임, 말의 싹들, 작게 바시시 웃거나 한숨짓거나 조금 흐느끼거나
그리고, 산 너머, 오늘 유난히 짙은 석양 아래, 잔잔히 흔들리는 벌써 죽은 사람들, 투명한 귀신들의 나지막한 목소리, 두런거림
가만히 멀리 바라보면...... 너무나 잘 보인다, 살아 있는 사람들, 마른 가랑잎처럼
바시락
부서지는 것
김정란 시인 / 소리없이 눈물, 나를 찾아오네
내 눈물 어디 갔나, 바장이며 빙빙 돌아보네
마음 한없이 무너져 저녁 바람 숨죽인 통곡으로 내 몸 무참히 흔들어도
내 눈물 어디 갔나 나는 울음소리 내지 못하네
길마다 길 가는 사람들 얼굴에서마다 마저 지워지지 않은 꿈의 옷자락 자꾸 내 눈에 밟히고 눈물 어디 갔나, 폭포처럼 무너지며 울고 싶네, 내 잘린 혀 뿌리로라도, 그것 아주 조금 남아 있기라도 하다면 세상에 아직 살아, 이렇게 멀쩡하게 아직 살아 진작에 죽은 여자
그 지워진 삶, 위태한 흔적 위로 소리없는 눈물, 울어지지 않는 통곡
그렇게도 자주.................................
김정란 시인 / 여자의 말 - 세기말, 혼자 여는 문
나는 그의 영혼을 눈여겨보았다 그가 걸을 때마다 미세한 삐꺽임소리가 새어나왔다 鄕愁 또는 갈증이라는 부재의 표지 그의 몸에서 조금 그러나 편안한 삶의 양식에게는 충분히 절망적일만큼 조금 살의 실감을 덜어내는 상처 균열 그가 무심코 내 곁을 지나갈 때 나는 아주 엷은 미묘한 먼지 냄새를 맡았다 아니 오래된 책 냄새였을까 작은 휘파람소리가 끊임없이 들렸어 아 세계가 그를 다치게 했구나 그의 상처에 대한 인식이 나를 그의 곁에 데려다놓았다 나는 향기로운 영혼들을 언제나 정확하게 알아본다 저 사람은 이백년 쯤 걸어 내게 왔음이 틀림없어
그가 흔들리는 걸 나는 알아본다 그렇다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나의 영혼 안에 그가 조용히 꽃등을 켜 들고 들어선 것은 그 흔들림의 자질 때문이라는 걸 그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는 저녁 바다에 가요 그리고 그는 머뭇머뭇 덧붙였다 나는 다른 사람이예요 나는 나인 걸 견딜 수 없어요 그 말 끝에서 세계의 모든 파도가 쏴아 거품을 일으키며 흩어졌다
저녁바다 바람 몇 줄기 쓸쓸하게 불어왔다 그리고 문이 어떤 불안한 입구가 파리하게 수평선 저너머에 떠올라왔다 그는 가만가만 그 문을 두들겼다 문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가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는 조용히 진저리치며 말했다 오 아냐 아직은 낯설어 난 계속할 수 없어 난 이 습한 未知를 견딜 수 없어
나는 그가 켜준 꽃등을 들여다본다 파도 위로 반사되어 수천의 광채로 고요히 빛나는 불 조그만 일렁이는 한없이 기다리는 참을성많은 불 나는 어느새 깨닫는다 그 대신 내가 그 문을 열어야 하는 것이라고 나는 그의 영혼이 지펴준 그 빛의 연약함에 기대는 법을 배운다 이젠 무섭지 않아 나는 바다 앞에 혼자 있다 금방 해가 지겠지 나는 그 문이 두렵지 않다 나는 세계의 어머니처럼 그 문을 향해 걸어간다 향기가 아슴프레 풍겨왔다
죽......... 음...........
김정란 시인 / 잎사귀 바람 만지며 돌아누울 때
아마 몇 생쯤 전이었다 내가 저 잎사귀처럼 슬프고 아름다웠던 것이?
눈이 아파 가슴도 피부도 땀구멍도 내장 속의 돌기까지도
그 잎사귀 바람 만지며 가만히 몸 뒤챌 때
난 알아 (난 기억한다고 말하지 않아) 나도 언젠가 그렇게 당신을 만졌었어 바람 같은 당신
아직도 그 잎사귀 바람 만지며 돌아누울 때 후두둑 소금 떨어지네
내 몸 당신 몸에 닿았을 때 그때 세계의 바다 밑에서 죽은 모든 여자들 모여 소금 만들어내던 소리
지금 그 소리 듣고 있네
그 소금 살에 묻히고 살아야 할 시간 안으로 걸어 들어가네 찬찬히 세계의 나의 시간 섞어 짜며 그래서 저 잎사귀 그 잎사귀 한데 붙여놓고 그리움의 거리를 몸의 체적으로 채우고
지금은 저기 있는 저 잎사귀 뒤에 당신 그림자 놓아두고 착하게 혼자 놀게 놓아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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