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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정란 시인 / 모래사면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6. 29.

김정란 시인 / 모래사면

 

 

내 가슴 속엔

어떤 비규정성의

경사가 있어

 

그건 지독히 강력하게

자기 원칙을 주장하지

날이면 날마다 자기 논리 안에서 강화되기만 하는

 

어느 날 뒤돌아보니

이미 늦은 거야

돌아갈 길이 지워졌어

 

뿌윰한 천사들 하나, 둘, 셋……

하냥 부드럽게 그 위태위태한

물질과 비물질

이것과 저것 사이의

흔들리는 경계

비스듬한 모래 언덕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와

 

매혹, 불안한……

그 기대지지 않는 희박한 언덕을

나는 천년 전부터인 듯이 바라보지

 

우울……또는……

기이하고 막막한 슬픔

 

그것들은 도착하지 않고

하염없이 오기만 오기만 해

 

나는 가만히 내 살을 들추어봐

거기 차곡차곡 쟁여진 기다림,

자기 원칙 안에서 완결된, 그것으로 충분한,

기다림, 화안한……

 

 


 

 

김정란 시인 / 바람의 말을 알아듣고 싶어

 

 

난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빈 유리병

바닥에 떨어진 불수의(不隨意)의 공허

또는 갈망

감이 잡히지 않는

생명의 뒤에 숨어있는

기질 기질

성(聖) 기질

 

난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난 완전히 비어버리기를 바랬다

하느님, 떨면서 하느님,

난 바람이 스쳐지나가는 길 위에 서있는

작은 꽃잎사귀가 되고 싶었다

 

아주 조그만 깨어있는 꽃의 잎사귀 한개

 

바람이 불 때마다 내 마음속에 은가루처럼 떨어지는

당신의 말을 알아듣고 싶었다

 

내 몸의 섬모를 다 흔들어 나를 비우고

그 말로 내 몸을 가득 채우고 싶었다

 

땅바닥에 떨어져 깨져 버린

귀먹은 유리병 고통스러워하는 유리병인 나는

 

 


 

 

김정란 시인 / 가을

 

 

가을, 나는 문득 죽음을 알아 버리지

 

바람,

난 문득 알아 버리지, 신비한 부서짐,

비스듬히 내 삶의 한 귀퉁이를

어딘가로, 나 알지 못하는,

 

곳.......... 있지만 없는......... 장소의

귀신들에게로 끌어당기는 것

 

가슴속엔 웬 수많은 목소리들,

속삭임, 말의 싹들, 작게 바시시

웃거나 한숨짓거나 조금 흐느끼거나

 

그리고, 산 너머, 오늘 유난히 짙은 석양

아래, 잔잔히 흔들리는 벌써 죽은 사람들,

투명한 귀신들의 나지막한 목소리, 두런거림

 

가만히 멀리 바라보면...... 너무나 잘 보인다,

살아 있는 사람들, 마른 가랑잎처럼

 

바시락

 

부서지는 것

 

 


 

 

김정란 시인 / 소리없이 눈물, 나를 찾아오네

 

 

내 눈물 어디 갔나, 바장이며 빙빙 돌아보네

 

마음 한없이 무너져 저녁 바람

숨죽인 통곡으로 내 몸 무참히 흔들어도

 

내 눈물 어디 갔나 나는 울음소리

내지 못하네

 

길마다 길 가는 사람들 얼굴에서마다

마저 지워지지 않은 꿈의 옷자락

자꾸 내 눈에 밟히고

눈물 어디 갔나,

폭포처럼 무너지며

울고 싶네, 내 잘린 혀

뿌리로라도, 그것 아주 조금

남아 있기라도 하다면

세상에 아직 살아, 이렇게 멀쩡하게 아직 살아

진작에 죽은 여자

 

그 지워진 삶, 위태한 흔적 위로

소리없는 눈물, 울어지지 않는 통곡

 

그렇게도 자주.................................

 

 


 

 

김정란 시인 / 여자의 말

- 세기말, 혼자 여는 문

 

 

 나는 그의 영혼을 눈여겨보았다 그가 걸을 때마다 미세한 삐꺽임소리가 새어나왔다 鄕愁 또는 갈증이라는 부재의 표지 그의 몸에서 조금 그러나 편안한 삶의 양식에게는 충분히 절망적일만큼 조금 살의 실감을 덜어내는 상처 균열 그가 무심코 내 곁을 지나갈 때 나는 아주 엷은 미묘한 먼지 냄새를 맡았다 아니 오래된 책 냄새였을까 작은 휘파람소리가 끊임없이 들렸어 아 세계가 그를 다치게 했구나 그의 상처에 대한 인식이 나를 그의 곁에 데려다놓았다 나는 향기로운 영혼들을 언제나 정확하게 알아본다 저 사람은 이백년 쯤 걸어 내게 왔음이 틀림없어

 

 그가 흔들리는 걸 나는 알아본다 그렇다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나의 영혼 안에 그가 조용히 꽃등을 켜 들고 들어선 것은 그 흔들림의 자질 때문이라는 걸

그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는 저녁 바다에 가요 그리고 그는 머뭇머뭇 덧붙였다 나는 다른 사람이예요 나는 나인 걸 견딜 수 없어요 그 말 끝에서 세계의 모든 파도가 쏴아 거품을 일으키며 흩어졌다

 

 저녁바다 바람 몇 줄기 쓸쓸하게 불어왔다 그리고 문이 어떤 불안한 입구가 파리하게 수평선 저너머에 떠올라왔다 그는 가만가만 그 문을 두들겼다 문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가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는 조용히 진저리치며 말했다 오 아냐 아직은 낯설어 난 계속할 수 없어 난 이 습한 未知를 견딜 수 없어

 

 나는 그가 켜준 꽃등을 들여다본다 파도 위로 반사되어 수천의 광채로 고요히 빛나는 불 조그만 일렁이는 한없이 기다리는 참을성많은 불 나는 어느새 깨닫는다 그 대신 내가 그 문을 열어야 하는 것이라고 나는 그의 영혼이 지펴준 그 빛의 연약함에 기대는 법을 배운다 이젠 무섭지 않아 나는 바다 앞에 혼자 있다 금방 해가 지겠지 나는 그 문이 두렵지 않다 나는 세계의 어머니처럼 그 문을 향해 걸어간다 향기가 아슴프레 풍겨왔다

 

죽......... 음...........

 

 


 

 

김정란 시인 / 잎사귀 바람 만지며 돌아누울 때

 

 

아마

몇 생쯤 전이었다

내가 저 잎사귀처럼 슬프고 아름다웠던 것이?

 

눈이 아파

가슴도

피부도

땀구멍도

내장 속의 돌기까지도

 

그 잎사귀

바람 만지며

가만히 몸 뒤챌 때

 

난 알아

(난 기억한다고 말하지 않아)

나도 언젠가

그렇게 당신을 만졌었어

바람 같은 당신

 

아직도 그 잎사귀

바람 만지며 돌아누울 때

후두둑 소금 떨어지네

 

내 몸 당신 몸에 닿았을 때

그때 세계의 바다 밑에서

죽은 모든 여자들 모여

소금 만들어내던 소리

 

지금 그 소리 듣고 있네

 

그 소금 살에 묻히고

살아야 할 시간 안으로 걸어 들어가네

찬찬히 세계의

나의 시간 섞어 짜며

그래서 저 잎사귀

그 잎사귀 한데 붙여놓고

그리움의 거리를 몸의 체적으로 채우고

 

지금은 저기 있는

저 잎사귀 뒤에

당신 그림자 놓아두고

착하게 혼자 놀게 놓아두고

 

 


 

김정란 시인

1953년 서울 출생. 평론가, 번역가. 한국외국어대 불어과 졸업, 프랑스 그르노블 III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2003년부터 상지대학교 문화컨텐츠학과 교수로 활동. 1976년 김춘수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시를 선보임. 시집  『다시 시작하는 나비』 『매혹, 혹은 겹침』 『그 여자, 입구에서 가만히 뒤돌아보네』 『스·타·카·토· 내 영혼 등. 평론집 『비어 있는 중심-미완의 시학』, 1998년 백상출판문화상(번역부문) 수상. 2000년 소월시문학상 대상 수상. 현재 상지대 인문사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