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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미라 시인 / 위패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6. 29.

박미라 시인 / 위패(位牌)

 

 

당신의 주소를 새로 장만했다.

이제 당신은 내 허락 없이 아무 데도 못 간다

 

최신 유행의 글씨체를 배워 문패를 적는다

당신의 취향을 참고해서 하얀 집으로 결정했다

당신이 달력 귀퉁이에 기르던 새 한 마리도 데려왔다

그 새, 어디가 아픈가 조금 작아진 듯하다

당신의 목소리를 흉내 내서

-새야, 불러본다.

들은 척도 않는 새 옆에서 혼잣말을 지껄인다

—문짝이 넓어서 답답하진 않을 거야

심심한 척, 무릎도 한번 굽혔다 펴 본다

 

하얀 집의 등기는 내 앞으로 해둔다

지금부터는 내가 보호자이다

 

당신을 새 집에 가두고,

기르던 새 한 마리 동거인으로 밀어 넣고

 

나는 내 집으로 간다

하늘이 어둑하다

 

 


 

 

박미라 시인 / 바오밥나무 그림자에게 다녀왔다

 

 

그림자조차 비만인 삶이 있다

 

걷고 걷고 걸어도

닿을 수 없는 길을

걷고 걷고 걷다가

 

숨어들기 넉넉한 그림자를 만났지만

빈손을 주머니에 감춘 채

까무룩 잠든 시늉이나 하다가

 

거미로, 나비로, 바위자고새로,

칡넝쿨로, 지칭개로,

강물로, 는개비로, 돌풍으로,

 

어쩔 수 없으면 사람으로,

 

또 무엇 무엇으로 거듭된 생을

다 실토해도

저 침묵의 길 위에 이파리 하나 보탤 수 없겠지만

그래도 발설하지는 마, 천 년쯤 혼자 알고 있어,

 

세상이 다 아는 비의(悲意)를 간곡히 전하면서

발목 튼실하고 가시 촘촘한 엉겅퀴로 다시 오겠다고

그런 줄이나 알고 있으라고

저린 발 주무르는

 

몸집 큰 슬픔이 나란하다

 

 


 

 

박미라 시인 / 작살나무

 

 

이름표를 달고 있는 나무들 앞을 지나다가

가슴에 묻어둔 피붙이를 만난 듯 몇 번이고 이름 외워본다

작살나무, 작살나무, 라니!

이름까지 작살이라 못 박고 떨고 계신

그대는 누구신가?

 

기다림이란 저렇게

만나기만 해봐라, 이빨 으드득 깨무는 일이다

너를 박살내기 전에는 죽을 수도 없다고

이승의 한평생을 꼿꼿이 서서 버티는 일이다

닿을 수 없는 거리인 줄 알면서도

끝없이 떠도느라 푸르게 질린 너의 등짝에

온몸으로 콱! 꽂히려는 것이다

 

당신을 기다립니다

온몸이 작살이 되었으나

그리움 쪽으로는 한 발짝도 떼지 못하는 나무가 있다

피를 찍어 피워 올린 이파리들 다 지고

청보라빛 열매 몇 주저흔처럼 남았다

표고 1300m의 계곡을 버리고 내려온 국립공원 입구에서

다시 한 생이 저문다

 

먼 바다 어딘가를 끝없이 떠도는 고래 한 마리

그가 작살을 피할 거라는 생각은 편견이다

작살이 꽂히는 순간

평생토록 빚어온 거대한 꽃 한 송이 활짝 피워 올린다

 

 


 

 

박미라 시인 / 울음을 불러내어 밤새 놀았다

 

 

한사코 뿌리친 것들이 아득해질까봐

천천히 걷는 봄밤이다

 

늙은 담벼락을 끝끝내 놓지 않는 담쟁이넝쿨 곁에서

오래 머뭇대는 봄밤이다

 

천 번을 계획하고 만 번을 망설인 월담(越-)을

해치우기 좋은 봄밤이다

 

이번 생에 꼭 한번뿐일 월담을 저지르다가 오도가도 못할 만큼 몸이 상해도

서럽지 않을 봄밤이다

 

아직 다 피지도 않은 복사꽃 냄새를 한주먹 얻어다가 함부로 낭비해도

죄가 되지 않을 것 같은 봄밤이다

 

 


 

 

박미라 시인  / 전조 증상

 

 

벽지 안쪽 가득 곰팡이가 피었다는 은밀한 말씀 듣는다

어쩌자고, 피었다는 말은 여기서도 환한가

그러니까 곰팡이꽃이 피어 번지고 번져서 벽에 가득하다는

그 집에는

곰팡이도 피고, 검버섯도 피고, 시름도 피고, 마침내 고독까지 우거져서

꽃그늘 아래 홀로,

하마 들릴까, 웃자란 귓바퀴를 창틀에 걸어 두었는데

저 물속 같은 혼자가 놀랄까,

세상이 모두 까치발로 지나가더라고

도대체 이 꽃소식을 어떤 꽃나무에 걸어야 하나

 

계간 『시산맥』 2023년 겨울호 발표

 

 


 

 

박미라 시인 / 아플 때

 

 

아플 때라는 낯선 시간

 

몸이나 마음에 큰 물이 들 때,

순정한 콩물 속에서 순두부가 엉기는 것을 망연히 바라보는

 

그런 때,

 

자꾸 생각하면 뜨거운 것이 뭉글 뭉글 엉키는 때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어떤 살점에 불이 들어가는

 

그런 때,

 

흘러갈 줄을 모르는

마른 땅에 고인 빗물이 서서히 말라가는 그런 시간

 

패이고 금간 곳에서

기어코 자리를 잡겠다고 비비적 대는 실뱀같은

 

열매도 별로 없는 상수리나무처럼

이파리 허름한 가지가 바람 한줄기를 객혈하듯 내뱉는

 

그런 때,

 

웹진 『시인광장』 2023년 5월호 발표

 

 


 

박미라 시인

경기도 광주 출생.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졸업. 1996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 시집 『서 있는 바람을 만나고 싶다』 『붉은 편지가 도착했다』 『안개부족』 『우리 집에 왜 왔니?』 『비 긋는 저녁에 도착할 수 있을까』 『울음을 불러내어 밤새 놀았다』 등. 수필집 『그리운 것은 곁에 있다』. 아르코문학창작기금(2020년). 충남문화재단창작지원금.(2016년.2019년). 세종우수도서선정(201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