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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로운 시인 / 슬기로운 취미 생활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7. 16.

이로운 시인 / 슬기로운 취미 생활

 

 

동강 난 다리 위에서

투신하는 차를 보았어요

백화점이 풀썩

사라지는 걸 보았지요

분장을 지운 아이들이

분장한 모습으로 돌아왔어요

 

견고하나요

무너지진 않을까요

의심이 많아요

비상구가 보이면 심장은 틱을 멈출까요

 

여기는

분수 광장이 유명해요

유명한 건 기억에 남아선가요

기억에 남아서 유명해진 건가요

 

누군가 솟구치다 추락했대요

빨대로 생각을 휘저으며

녹은 비명을 빨았다 놓으며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모르겠어

 

레츠 고 에브리웨어!

 

설렘은 이륙 직후가 절정이죠

모니터 속 아이돌을 따라

안전 요령을 숙지할 때

덩달아 흥얼대다 보면

두려움도 글쎄

흥겨울 때가 있더라고요

그래도 침착하게

옆 사람과 통성명 정도는 해둘 거예요

 

(혼자 남을 걸 대비해서요)

 

남는다는 건 좋은 걸까요

 

늦잠을 자는 바람에

길이 막혀 돌아오는 바람에

부적절한 이유가

적절한 이유가 되기도 해요

 

바람에 식은땀을 말리는 사람들

 

광화문 광장에서

J를 기다리고 있어요

 

지금 제 뒤에

교보 빌딩이 아직 있나요

 

아, 의심을 즐기는 편이라서요

 


 

이로운 시인 / ​구름 맛집

 

 

 이곳은 구름 맛도 아삭아삭해요

 

 수국이 손짓하는 길을 따라 소문난 맛집을 향하고 있어요 해발 1500미터를 올라 올려봐야 겨우 찾을 수 있대요 고산병 있는 사람은 사절이라는 문구가 문 앞에 큼지막이 붙어있지만 돌아가는 사람을 만난 적은 없어요 빨간 지붕을 가진 건물의 격자무늬 창을 들여다보다 푸른 수국과 눈이 마주쳤어요 빵 터진 웃음 뒤 남보라빛 애수 흐르는 묘한 분위기는 맛을 더한다지요 소나무 숲에서 피톤치드 구름을 삶아낼 때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도 여기는 구름이래요

 

 요리는 한결같아요 구름 한 가지로 승부를 건답니다 바람에 무친 구름 샐러드 한 접시 노을에 구운 구름 안심 스테이크 한 접시 상한 구름의 열매를 다져 우린 구름청 한 잔 생김은 달라도 뒷맛은 같죠 이곳의 영업시간은 0시부터 0시 0시를 생각하다 시간을 잊는 사람도 있다네요 당도 높은 새빨간 거짓말에 흘린 웃음을 닦을 때도 있었다니까요 식당 앞 언덕을 따라 구름을 재배하는 비닐하우스가 밤새워 어둠을 밝히고 있는 게 신비로웠어요 깊은 밤 허기진 사람들 쉬이 찾아오라는 주인장의 배려일까요 참! 주인장 이름은 달랏이래요 뭉게구름처럼 허리가 두리뭉실 푸근한 인상을 가진

 

 여행 기간 내내 이곳을 찾았어요 그리고 아삭한 그 맛이 그리울 거예요 재료는 같지만 다른 맛이 일품인 집

 

 달랏은 역시 달랏 하면서요

 

 


 

 

이로운 시인 / ​무브 투 헤븐*

 

 

주소 없는 주소를 향합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천국의 입구를 확인하는 동안

경직된 침묵은 귀를 세우고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묻습니다

 

떠난 이를 위해

비우고 닦는 일은 늘 하는 일

 

풍문을 통과한 말들이

뇌리에 박혀 두통이 잦아집니다

폐에 엉겨 붙은 말들이

검은 날숨을 뿜어냅니다

 

어둠은 밤에 쓰이는 색입니까

 

어쩌면

눈먼 이에게 한낮은

찬란한 스펙트럼을 가진

어둠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을 뜨면 쏟아지는 어둠

암막 커튼 사이

뜯어진 빛의 올을 더듬어 여민

빛이 어둠이고 어둠이 빛인 방

 

신을 벗고

신을 신습니다

한 줄기 빛마저 어둠으로 채색된

이름 없는 시간을 따라 걷습니다

 

마른 풀처럼 무거운 이야기

봉분처럼 수북한 일회용 용기 여기저기

기운 묘비처럼 꽂힌 나무젓가락

 

걷습니다

 

천천히 걷습니다

 

누군가의 길을 걷는다는 건

긴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

 

슬픈 포만감은 어떤 겁니까

 

안녕. 나를 부탁해

 

빛이 빛이 되기를

 

신을 벗어

창가에 가지런히 놓아둡니다

 

* 무브 투 헤븐 : 넷플릭스 드라마

 

 


 

 

이로운 시인 / ​덤

 

 

주말 성전은 덤의 천국

덤으로 살아가는 사람과

덤을 갈구하는 사람으로 붐빈다

 

그들은 덤 앞에서 참회한다

덤으로 참회한다

덤덤하게 울부짖으며

지옥과 천국을 오간다

한 곳이리라. 마음이 두 갈래일 뿐

 

딱 세일 기간 만입니다!

 

허리 묶인 상품 수북한

365일 행운 마트 입구

판매원이 목청을 드높인다

덤을 높이 치켜들고

밀치며 달려드는 사람들

덤을 움켜쥔 눈빛이 이글거린다

 

세상엔 덤도 많지

 

폭염엔 한바탕 소나기가 덤이요

앙상한 겨울나무는 눈꽃이 덤이고

잔잔한 바다엔 거친 파도가 덤

 

덤이 덤을 낳고

덤이 덤을 낳고

덤에 묻혀 덤덤하게

제 봉분을 쌓으며 사는 사람들

 

무덤은 덤이 사라진 세계

 

슬픔도 덤이다

 

 


 

 

이로운 시인 / ​샌디에고 금발 미녀가 산다

 

 

 바닥을 쓸자 금빛 머리칼이 한 움큼이다. 그녀는 내가 잠든 사이에 모닝커피를 내린다. 샌디에고 해가 뜨는 거실. 우린 마주치지 않는다. 한 식탁에 앉아 나는 아침을 그녀는 저녁을. 그녀가 어둠을 이야기할 때마다 나는 백야를 떠올린다. 그녀는 수평선 너머를 응시하고 나는 히말라야 야크를 걱정하며, 먼 곳의 일기 예보에 귀 기울인다. 서로에게 등을 보이며 팽팽하게 당기고 우리의 키는 웃자라거나 줄고. 엇갈린 기척을 밟다 박힌 빛의 조각들. 그 빛의 행방을 쫓아 언젠가 함께 거닐자던 라 호야 비치에 다다른다. 샌디에고의 바람이 불고. 풀린 머리 끈이 파도에 휩쓸리자 문득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는 두려움에 해무 속 환영에게 말을 건넨다. 안녕? 안녕이란 말로 멈춰 세울 수 없다. 샌디에고에서는

 

 물과 모래 위를 걸으며 나눈

 우리의 언어는

 소실점에 이르러

 비로소 동어가 된다

 

 잠 못 이루는 해

 

 잠 못 이루는 달

 

 물의 허공에

 

 


 

 

이로운 시인 / 집으로

 

벽장 안에서 장마가 지나길 기다렸어요

새집은 새집대로 헌 집은 헌 집대로

새지 않는 곳은 없었죠

벽을 뚫고 자라는 물의 뿌리

그 위로 무성히 번지는 검은 포자

새롭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만

마트료시카처럼

내 안의 나를 꺼내고 꺼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생의 방식이라면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요

차라리 오감이 무뎌지기까지는

견딜 수 없어요

절망도 뿌리내리고 싶은 날이 있죠

한 번도 본 적 없는 당신의 품이라면

분만 대기실에서

연신 등을 쓸어 주던 엄마의 목소리처럼

따스하고 나직한 소리 들려올지 누가 알겠어요

비가 그쳤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고요할 뿐

어쩌면 내가 태어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로운 시인

서울에서 출생. ​본명 이은희. 2022년 《시와 경계》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