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진주 시인 / 방파제에서
삼각의 구조물인가 싶지만 숨겨 놓은 한 면이 있어 어디서든 얽히고설킨다
테트라포드 뿔에 올라선 몇 명의 남자아이들 잔물결의 연기를 내뱉는다 파랑 곳곳이 필터라는 것 가지런한 스크럼으로는 구겨진 기성을 막지 못한다는 것
테트라포드, 청춘의 혐의가 짙다
뜨거운 시절이란 배짱과 딴청으로 얼룩진 진창이란 말인가
굽이 높은 집을 나와 아무 연고도 없는 뒷골목으로 전력 질주하는 일 편향과 과감일지라도 의무가 없어진 울음은 울지 않았다 도무지 참회할 일 한적 없는데 변론의 기회마저 오지 않는다
남자아이들은 성급한 물결로 인다 테트라포드의 분간된 경계가 끓어오른다
어느 곳이든 경계를 쌓는 순간 안과 밖으로 나뉜다 죄 없던 곳이 바깥이 되면서 죄 많은 곳이 된다
양측 모두의 적이란 다만 경계일까
간절기를 지나온 바깥은 폭력적이 되고 지키는 안쪽은 극적으로 편편해진다
서툴고 불편한 편승일지라도 테트라포드는 육지의 최전선이고 너울 성 수평선이 무시로 오는 곳이다 남자아이들의 삼각을 표방한 테트라포드, 쉬지 않고 흠뻑 물을 빨아들였다 중심을 뱉어낸다
고은진주 시인 / 플래카드 사이 바람을 매어놓다
두 그루 나무 사이 상관없는 말을 매어 놓았다 말의 색체가 흔들려도 플래카드 든 나무들 지층처럼 정연하다 공중 가로지르는 구호만 불모지로 넘나든다
방금 건축된 〈아파트 실*수〉가 요령껏 맞춤 제작된 〈환영〉을 환송한다 지평선으로 물려있는 네 개의 귀퉁이 〈경축〉 외치는 〈한마당 축제〉에 몰려 궁서로 구부러졌다 앙증맞게 펼쳐진다 요구사항 다 풀어보자는 듯 막간을 이용해 매력을 안무하는 플래카드〈마감임박〉이다 과잉의 〈기호1번〉자주 깨지는 음절로 판매 중이고, 떼인 돈 받아주거나 〈목격자 찾음〉곧 철거될 간절한 간극이다 도망가는 〈신용불량〉 붙잡아 들이고 〈뺑소니〉 친 불명도 밝혀내기를,
나무들은 공허한데 나무 사이는 분주한 좌판의 배수진 같다 매어 놓은 반대는 지나가는 사람만 볼 수 있어 저기 어디쯤 유치한 희망하나 매어놓고 싶어진다
고삐를 매복처럼 쥐고 있는 공한지에서는 적당한 물음이 있어야 숨통도 팽팽한 법
고은진주 시인 / 구름과 귀와 이빨의 잠
휴지 한 통을 찢어놓고 두 귀와 숨이 들락거리는 배가 잔다, 삼각뿔 같은 잠
개의 잠은 정해진 무늬가 없어 바짝 마른 들판이 되었다가 밭고랑 넘어가는 언덕이 되기도 한다
구름은 귀가 없고 엎드린 개는 구름을 덮지 못하고 소리는 쉬파리 같이 개의 두 귓속에서 까닥거린다
구름은 개가 물고 찢은 흔적 위로 떠다닌다 소화가 덜된 발음으로 이를 갈아도 곁에서 멀어지지 않는다 잠의 천적이 된 적은 더더욱 없다 손님이 없는 점포가 넘어가게 생겼는데 일몰의 잠을 잔다, 개는 동쪽의 부스럭대는 소리를 듣고 서쪽 꼬리로 코를 곤다 어느새 이슬점에 도달한 잠 잠에도 온도가 있다
귀와 이빨의 습도가 같고 구름과 졸음의 곡선이 맞아떨어질 것 귀밑머리 엥엥 회전하는 하품 머리를 번쩍, 들었다 조용히 기울어지는 꼭지가 잠의 쉼터다 이빨 자국 가득한 소나기가 멍멍멍 내린다 아무리 불러도 개는 흩어지지 않는다 -애지 2023년 가을호 발표
고은진주 시인 / 모퉁이 점유권
그가 살던 케케묵은 대문 허물어지고그 자리에 사면을 가진 모퉁이가 지어졌다모퉁이의 역할이란 오전과 오후로 햇살을 나누는 것등교와 하교의 풍경을 목담하는 것
오후의 모퉁이로 밀려난 그는이월에 꺾어진 물소리삼월 어느 무심결에야 듣는다
그늘이 낮은 모퉁이와높은 모퉁이는 불화한다몇 번씩 급선회했던 바람의 줄기낮은 그늘에서 발화하고 있다
변두리로 내몰리면서 발 달린온갖 개성은 떠났지만두 개의 정면을 가진 모퉁이 돌아가면숨어있던 독방의 곡예도 만날 수 있다가로수 온기 꺾이는 지점에서는 살굿빛 충고마주 보는 연습에 맛 들인 벚나무와푸른 당부의 샛길순무 같은 개천은 여전히 그의 소유다
한파가 몰아치는 표정으로 서 있는컨테이너하우스 지켜내려고모퉁이의 짓눌린 발목 씻긴다삐죽하게 튀어나온 봄맨손으로 만진다
방긋, 혹은 방금 솟아난 봄의 잎사귀는모퉁이가 없어서 좋겠다
고은진주 시인 / 달력이 여름을 말하기 시작할 때*
막 피기 시작한 장미가 문을 열어 주었네. 탁상용으로 주조된 여름이었네. 어떻게 야만과 측은을 딱 떼어 놓을 수 있는지 장미 넝쿨 속에서 나는 울었네.
여름의 날짜가 하나씩 또는 무더기로 관에 넣어지고 있을 때, 우리는 동그라미를 치고 날짜가 이탈하지 않도록 서로의 머리를 쓰다듬었네. 예고도 없이 아무 데나 던져지고 파헤쳐져 소품에 불과한 숫자가 쓰러지고 있었네.
1에서부터 10까지 똑같은 검지 손가락으로 똑같은 사투리를 섞어 똑같은 얼굴을 하나씩 하나씩 가지 치는 중에도, 질서가 없는 듯 질서정연하게 나열되어 있는 달력은 제 입으로 여름을 말한 적이 없었네. 넝쿨로 엉키고 닫힌 골목, 문 여럿이 쾅쾅 울었네.
휴교령이 내려진 책상마다 먼지의 꽃다발이 놓여졌네. 달력의 숫자가 팔목에 박히고 루트의 공식 안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꽃봉오리, 여름의 냄새를 맡은 파리 떼가 몰려들었네. 파리약 같은 장미 꽃송이가 두개골을 비집고 들어왔네. 훌쩍훌쩍 쏟아져 나가는 하루 이틀 열흘, 넝쿨이 잘린 채 기념식장으로 가는 숫자를 기록할 수가 없었네.
밟히고 긁힌 자국은 모두 어둠의 달력에 친친 감아 놓았네. 대체휴일을 사용하지 말라는 법이 만들어졌으나 검은 장미가 피고 달력의 빨간 숫자가 모두 빠진, 여름휴가를 반납하지 않겠네.
쓰레기 치우듯 숫자를 몽땅 쓸어 낼 수 없어서 날짜 몇 개를 상실하겠다는 계약서에 사인을 하네. 발밑으로 떨어진 매운 연기를 애도하다 달력 한 귀퉁이에 막 지기 시작한 구호 하나를 메모하네.
* 메리 올리버.
고은진주 시인 / 수변작물 물결의 중심에 미나리가 자란다
집합으로 자라는 것들 주로 낫으로 베어지거나 포기가 아닌 단으로 묶이는 것들 물의 단으로 묶여 자라는 수생식물 강물에 두둥실 떠 있다 찌뿌둥한 하늘 출렁거리면서 정화되어 간다 미나리를 보면 기름 두른 프라이팬 오징어초무침에 한강 물 시큼해진다면 두어 번 고개 저으면 될 일 물결은 비빔밥을 비비는 젓가락 횡재수 뒤 손재수, 가혹 뒤의 평화 같다 작물이 커가는 강물엔 일렁이는 상념이 많다 일렁이는 불 조각 일렁이는 좌절 일렁이는 초조함까지 집합으로 자란다 무지개 바퀴가 고속으로 자란다 벚꽃 잎이 뿌리도 없이 강물 위에서 핀다
일렁일렁 거름을 주고 가만히 어루만지는 물의 결들 오랜 세월 그렇게 흘러왔으니 물결은 더없이 비옥하겠다 어느새 평평해진 강물 속에는 내가 감당 못한 불꽃이 자라고 있다 -반년간 『문학수첩』 2024년 하반기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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