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현수 시인 / 적멸보궁
적멸보궁은 언제나 적막 꼭대기에 세운다 돌층계마다 고요가
한 계단씩 높아진다
언덕 위엔 새 발자국만 한 집 한 채 얹어 놓았다 투명한 사리 몇 알 낳으시고 부처님은 출타 중이시다
박현수 시인 / 우항리 공룡 발자국
한번 지나가려면 저 정도는 되어야지 뇌경막을 움푹 움푹 밟고 간 수만 근의 수사학 9천만 년 지나 읽히는지 마는지 백악기 한페이지 바닷가에 던져두고 묵직한 종적조차 묘연하지 않은가
박현수 시인 / 고인돌
1 거대한 바위로 상상력을 포석하던 시대를 경배하라
2 신이 사물들 사이로 사라지고 인간의 마을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바람도 구름도 어제의 것이 아니다 인간의 망막에 비친 사물들은 신으로 가는 통로를 알지 못한다 모든 길은 폐쇠되었다 폭우에 잘려나간 길처럼 다시 끌어올릴 수 없다 마을은 고립되었다 새들도 제 이웃을 잊어버렸다
3 언덕 위엔 무거운 구름이 들어 올려지기 시작하였다 반쯤 땅에 박히고 땅 속에 묻혀버리고 언덕 위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한때 하늘을 떠다니다가 지상에 가라앉은 거대한 빵들이 공중부양을 시작하였다 등뼈 곧은 꿈들이 지상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개미 떼 위에 떠다니는 장수풍뎅이처럼 무거울 대로 무거워진 지상의 구름은 언덕으로 옮겨지고 그 아래 수많은 욕망의 척추들이 지네발처럼 분주하였다
4 동트는 언덕에 기단부로만 세운 원형의 탑 정결한 식탁에 올린 한 덩이의 솜사탕 거대한 주제일수록 수사학은 가난해지고 오래 다듬을수록 구도는 단순해진다 하늘로 쏘아올린 화살촉은 기도처럼 돌아왔으나 하늘로 오르는 향연의 길은 열렸다 묵직한 단어 몇 개로 건축한 최초의 시가 봉헌되었다
숭고의 문이 세워졌다 초월로 가는 경전이 완성되었다
5 에드벌룬처럼 맛있게 허공에 들린 빵 엄청남 무게의 구름 이것을 공중에 올려놓은 것은 거인이 아니다 심연 속에 유동하는, 피할 수 없는 가는 등뼈들의 욕망이다 키 작은 검은모루동굴 사람들로부터 내려온 은밀한 꿈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욕망
6 저 거대한 바위 아래 미세한 돌촉, 정교한 칼날이 없는 건 아니다 그것들은 거대함 아래 눌려 있다 정교함은 바위의 자세를 설명할 수는 있어도 구성할 수는 없다 세대를 아득하게 이어나간들 영원히 그 자세에 도달할 수 없다
7 허구는 거대할수록 실재한다 무너져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 시집<위험한 독서>2006
박현수 시인 / 헌책방에서 이승훈시집을읽다
낙성대 삼우서적 헌책방에서 0]승훈의 길은 없어도 행복하다 초판본을 읽었다 시집 여기저기밑줄과 메모가 놓여 있다 언어조립공 이승훈씨 라는 시는 이렇게 끝난다/끝나지 않는다
그의 만찬회엔 그의사랑스런 악동들인 그의 희생된 과거와 그의 염소와 강아지와 그의 옛날 애인이 초대된다
마지막 그의 옛날 애인이 초대된다 에 밑줄이 그어져 있다 그리고 거기엔 책 밀면에 적힌 문예창작과 이도현의 필체로 이런 구절이 쓰여 있다
나는 시를 쓰기 위해 내 앞에 옛날 애인을 초대하기로 한다 옛날 애인과 그 전처럼 카페에서 차를 마신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그가 키스하며 가슴을 만진다고 생각해 보기로 한다
이 시집이 떠돌아 다니는동안 언어조립공 이승훈씨 는 완결되지 않을 것이고 애인의 가슴은 따뜻할 것이고 건포도 같은 젖꼭지는 부풀어 오를 것아고 시의 피리어드는 내일로 미루어질 것이다
박현수 시인 / 길에 대하여
태초에 혼돈을 정리한 것은 길이다 돌도끼를 굴리며 하루 종일 들판에서 헝클어지던 길은 집으로 들고 모든 길은 문지방을 베고 쉬었다 실핏줄처럼 파생되는 길에 길을 잃은 것은 길이다 푸른 들을 가르며 모여드는 길이 두려워 사람들은 나무에 오르고 바다 속에 들기도 하였다 길을 만들고 길을 잊고 길을 묻고 길을 잃는다
집과 무덤까지의 가장 우회한 길이 삶이라면 잃은 길 위에 다시 잃은 길이 시라는 것이다
-시집 <위험한 독서> 2006
박현수 시인 / 명절날, 형제를 잃다
이번 한가위에도 형제들이 싸웠다 막내는 이번에도 오지 않았다 동네 호프집 구석 자리에 몇 차례 술이 돌자 서운함은 아무 말이나 불러들였다 무슨 개소리야 엄마를 객관적으로 봐야 한다는 게 셋째 형이 둘째 형을 향해 포문을 열었다 화장실까지 따라가서 둘째 형이 셋째 형의 멱살을 흔들었다 큰형이 둘째 형을 달래는 사이 먼저 욕한 것은 아무래도 잘못이라 나무랐다 나와 가장 친하다고 믿는 셋째 형의 얼굴엔 서운한 빛이 역력했다 둘째 형과 셋째 형이 화해하는 사이 큰 형은,나와 막내도 말 한 마디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싸움을 시작하였노라고 상기시켰다 좀처럼 풀리지 않는 정체 속에 내 앞에서만 끼어드는 차들을 속수무책으로 보기만 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기위만 같지 않았으면 성공이라 생각해본다 매번 사면이 반복되는,형제라는 긴 형벌을 생각해본다
상처를 덧나게만 하는 어설픈 화해를 하고 이번 명절에도 나는 형제를 모두 잃고 내려왔다
-시집 『겨울 강가에서 예언서를 태우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황외순 시인 / 탯줄 외 5편 (0) | 2025.08.05 |
|---|---|
| 권용욱 시인 / 깡통 외 4편 (0) | 2025.08.05 |
| 김차순 시인 / 다시오름 외 5편 (0) | 2025.08.05 |
| 문철수 시인 / 꽃은 외 5편 (0) | 2025.08.05 |
| 강유환 시인 / 묵화 외 5편 (0) | 2025.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