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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상 시인 / 청춘들
청춘들, 사이버 망명이라 했지만 쫓겨난 것에 불과하다 아무도 땟거리를 챙겨주지 않아 말라가는 청춘들 짧은 이력은 한겨울 낙엽 애타게 폰을 기다리지만 벨은 침묵 모드 채용 공고를 뒤져 구겨진 지원서를 던져본다 불은 면발 같은 몰골들
청춘들, 파업장에 끼어 앉아 구호를 외친다 살려달라고 문 닫지 말라고 한 푼이라도 더 달라고 공정하자고 월세 내게 해달라고 꿈을 짓밟지 말라고 희망의 끈을 자르지 말라고 차가운 맨바닥 엉덩이가 시리다
청춘들,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너도 나를 사랑하지만 우리는 딱 여기까지다 얼굴만 바라보다 입술에서 얼어 고드름이 된 사랑한다는 말 딱 여기까지다 의무도 없고 책임도 없는 사랑이 길바닥에 나앉았다
권위상 시인 / 우리는 아직 멀었다
아파트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근거렸다 동네에 자폐 학교가 들어선다 했다 더러는 분개하고 누구는 팔을 걷어붙였다 공청회에서 사람들은 현수막을 들고 떼 지어 몰려왔다 단상을 점거하고 드러눕고 난장판이 되었다 그때 대여섯 여인들이 무릎을 꿇었다 울면서 잘못했다 용서해달라 도와달라 했다 흥분한 사람들은 그들에게 삿대질했다 집값 덜어진다 다른 데도 많은데 하필 여기야 아이 엄마들이 눈물 흘리며 빌고 또 빌었다 이 틈을 타 지역 국회의원은 그 자리에 한방병원을 짓겠다고 공약했고 재선에 성공했다 결국 학교는 들어서지 못했다 아파트값은 아이들의 교육보다 틀림없이 위에 있었다 나와 조금 다른 아이들을 허용하는 건 있을 수 없었다
아이 엄마들은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다 원래 그랬기 때문에 실망 좌절 이런 단어는 쓸데없는 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저 하늘 지나가는 구름이 잔뜩 찌푸렸다 먹물을 뿌렸다 아이의 얼굴을 꼭 껴안았지만 불안했다
마감 뉴스에 엄마가 아이를 안고 투신했다는 비보 우리는 아직 멀었다
-계간 『시에』 2021년 겨울호에서
권위상 시인 / 나트륨
나트륨 혼합물이 비커에서 끓고 있다. 이 금속은 다른 물질과 결합하여 변신에 변신을 거듭한다. 소금의 원료가 되었다가 인류를 멸할 폭발물로, 실험자인 나와 동화되었다가 우주의 일부로 돌아가는 저 생명체, 놀랍다. 눈을 크게 뜨고 데이터를 축적하면 차차 쌓여가는 점성. 끈적이는 땀을 닦아내면 편두통이 바늘 같은 새치를 통해 콕콕 찔러온다. 저 혼합물이 비등점을 넘어갈 때 나는 담을 넘어 우주로 비행할 것이다. 벨이 울리고 점멸등이 켜지자 비로소 나는 허리를 편다.
나의 혼합물이 우주에서 유영하고 있다. 불확실성 시대에 나는 적당히 타협할 우군도 없다. 누구와도 섞일 수 없는, 오직 반복하는 실험과 두드려야 하는 수식들. 내가 나를 믿고 나의 확신을 믿고, 믿고 싶은 것을 믿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실패를 믿어본다. 이따금 내가 나를 부정하려 치면 서로 투명한 가슴을 포개 차례를 기다리는 저 비커들이 한꺼번에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눈금이 닳아서 희미해진, 백내장을 앓는 어머니의 눈동자를 가진 저 순수한 목숨들.
마스카라 지운 초승달. 아내의 잠이, 서툰 화장이 거울 가를 더듬는다. 무서워요 오늘도 못 들어오시죠. 차가운 시간이 뚜벅뚜벅 다가와 목덜미를 짓누른다. 은박지처럼 반짝이는 밤하늘 나트륨 가루가 뿌려져 있다. 저 분말이 아내의 눈물과 반응하면 하얀 불꽃이 되어 폭발할까. 백 년을 기다렸다는 고차방정식의 한 축, 그 미지수로 남을 수 있을까. 일교차가 심하다. 이제 나트륨 조각을 썰어야 할 시간이다.
권위상 시인 / 친일 문인 기념 문학상 이대로 둘 것인가 1
나라를 빼앗긴 이회영 여섯 형제가 비분강개해 전 재산을 정리해 가족 모두를 이끌고 만주로 넘어가서 독립전쟁을 준비하다 쫓겨 다닐 때 누구는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황군을 위해 목숨 바치자고 시를 헌사했다 해방이 되고 군부 독재가 들어서자 독재자를 찬양하고 그를 위한 시를 헌사했다 미당 서정주, 그가 그랬다
가장 밟지 말아야 할 길을 걸어간 그를 기리자고 조상의 친일을 물타기 하고 싶은 언론사에서 만든 미당문학상 오늘날에도 이 상을 심사하고 고개 숙여 감사히 받고 박수 받고 두둑한 상금으로 동료들에게 밥과 술을 사고 가슴에 단 훈장을 어루만지는 시인들아
부끄럽다 진실로 부끄럽다 인간이 짐승과 다르다면 부끄러움을 아는 것일진대 부끄러움은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시 쓴다고 문학 한다고
차라리 붓을 내팽개쳐라
권위상 시인 / 도림동 철공소
세상일이 막히고 뚫리듯 오늘도 꽉 막힌 철봉을 예열한다 단조강 마환봉 마육각 힘줄 불끈 솟은 철근 은빛 쇠파이프들 불꽃을 뿌리며 잘려나간다
분주한 작업 속에 또 다른 세상이 있다 누군가의 손에 쥐여 휘둘리는 쇠파이프 붉은 띠를 두른 자와 방탄 헬멧들이 격렬하게 부딪히는 현장 구호와 고함소리 피가 터지고 끌려 나가고 심장이 뚫린 쇠파이프가 내동댕이쳐지고
풀리지 않은 세상일은 아무도 모른다 그라인드 아래 튀기는 불꽃은 금방 사그라들지만 정확한 절단이 가끔 필요한 삶 사람이 사람을 부정하는 세상에 저 두꺼운 상판을 긍정해야 하는데
제 몸을 녹여 단절된 세상을 이어주는 용접봉 저 불꽃에 심어져 있는 파란 희망 오늘 아침 택배 기사가 환한 미소를 한 박스 내려놓고 간다
-시집 『마스카라 지운 초승달』중에서
권위상 시인 / 사라진 봄
서부간선도로를 달리다 보니 어느새 서해안고속도로라 한다 서부간선과 서해안고속 그 경계는 어디일까 이어져 연결된 도로인데 표지판에 분명히 씌어 있을 텐데 못 보았는가 보다
한 해가 지나고 다음 해가 온다는 날 해가 뜨는 것도 똑같고 어제와 바뀐 것도 하나 없는데 새해가 왔단다 아무 변한 것 없이 아무 한 것도 없이
봄이 그렇다 언제 왔다가 언제 가는지 벚꽃 잎이 눈발처럼 흩날리고 껍질을 깨고 나온 병아리가 몇 번 졸더니 봄은 벌써 가고 없다 누구는 봄은 없다고 단언한다
현기증은 귀에 봄이 와서 그렇단다 조금만 기다려보란다 병원을 나오자 봄이 어지럽게 흩어지고 있다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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