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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아 시인 / 고향 언덕
고향집에 완행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버스 귀퉁이에 휩쓸리며 품에 안기는 아릿한 언덕이 있다 억새꽃 가득한 그 곳은 만선들이 떼를 지어 파도를 이루는 하얀 수염 같은 가을을 끌어다 놓는다 그 곳에유년의 하늘을 채워 넣고 구름을 앉혀 놓으면 나뭇가지마다 하늘거리던 잎맥 같은 고향땅의 숨결이 일렁인다 마을 사람들은자루를 등에 메고 입김 뿌리며 산에 올라 도토리를 주어다가 물에 불려 쓴맛을 우려내었다 저마다 억새꽃 한 다발씩 안고서 언덕을 내려가던 사람들 안개 같은 기억들은 내면의 간이역이 되어 고향에 내려 갈 때마다 붙잡는다 마을 가득휭 불어오는 풍경들 바람 탑은 언덕 가득 세워졌다
전정아 시인 / 페르몬 발자국
숲이 매력을 잃은 걸까 달기만 한 꽃의 꿀 똑같은 진드기만 키우는 엉겅퀴 신생의 것을 열망하는 개미는 고층 건물도 마다하지 않는다 다양한 인스턴트 식품과 최신유행이 드나드는 집 언젠가 돈에 반한 개미가 사람의 금고에 구멍을 낼지도 모를 일 개미가 마음만 먹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리라 미래엔 무언가 잃어버렸을 때 분실물센터보다 개미의 창고에 먼저 가보라 만물상 주인이 된 개미가 웃음을 철철 쏟으며 당신을 맞더라도 놀라지 말지어다 쉬지 않고 움직이는 개미 가야 할 길이 벽이라면 뚫어서라도 간다 개미는 어디서 제 생의 화룡점정을 찍고 싶은 걸까 버스에서 지하철로 지하철에서 KTX로 멀지 않아 비행기 좌석에 앉아 있는 개미와 마주칠지도…… 어쩜 개미는 미래 도시 계획을 설계하며 숲 주식회사의 최대 주주를 꿈꾸고 있는지 모른다 부엌을 기웃거리던 개미가 갓 차려진 식탁 위로 방향을 틀기 시작한다 좌 아 악 ...... 순식간에 도착한 개미의 전대
그새 나는 페르몬 발자국을 많이도 찍어 놓았다
전정아 시인 / 호미
밭에 뿌리를 잘못 내린 풀은 뽑아야 한다며 최씨 할머니 호미의 날을 바짝 세운다 강낭콩 밭에 찾아온 자잘한 풀 불청객들을 깡그리 뽑아버린다 나이 아홉에 시집이란 것을 갔는데 시어머니 매운 시집살이에 한시도 호미를 놓아본 적 없었다는 최씨 할머니 죽지 못해 살다가 문득 콩밭을 보니 고랑에 뿌리 뽑힌 채 널브러져 있는 풀이 자신의 신세와 무관하지 않더라 두 살 위인 신랑과 고무줄 놀이를 하다가 시어머니한테 호미자루로 된통 얻어맞았다는 머리 입이 간지러울 때마다 머리카락 들춰내며 커다랗게 박혀있는 혹 하나 보여준다 에이 씨 푸랄 호미! 별안간 호미가 내던져진다 술 퍼먹고 동사했다는 남편이 마른 오징어 다리처럼 질겅질겅 씹힌다 딸만 내리 다섯을 낳다가 끄트막에 낳은 아들이 서울 집에 올라가 편히 사시자고 했다는데 최씨 할머니, 아들 집에 잡초 들이는 것만 같아 손사래 쳤다 한다 애초에 잡초는 서러운 거라 일찍 죽는 게 좋은 팔자여 벌겋게 눈시울 붉힌다
<2007년 '우리시' 5월호 초대시인>
전정아 시인 / 내가 꿈꾸는 언덕
새들이 햇빛처럼 조잘대는 푸른 언덕 평등한 사람끼리 어깨 마주하며 따뜻한 생의 언덕에 모여 살았으면 좋겠네 서로 미워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으며 누군가의 가슴에 뚫려있는 구멍을 제 가슴으로 막아주는 마음 따뜻한 사람들 모여 메마른 나무들 꽃피웠으면 좋겠네 그 곳엔 가난한 사람도 없고 불쌍한 짐승도 몸 아픈 생명도 없었으면 좋겠네 욕심 없이 텃밭 일구며 사랑하는 사람과 일가를 이루어 앵두 같은 아이들 낳아 기르면 좋겠네 복사꽃 분홍빛 웃음 피어올리면 꿀벌과 나비들 꽃잎과 어우러져 사람과 함께 한 하늘 되어 춤추는 곳 사철 사랑으로 푸른 향기 가득한 마음 따뜻한 언덕에 살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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