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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신 시인 / 크림에서 빵까지
빵을 들여다보는 빵빵한 엉덩이 엉덩이는 확실하고 크림빵은 뭉실해 여기는 방이 여럿 빵, 빵, 빵, 곧 방문을 건들고 크림에서 빵까지 길이 없고
크림이 엉덩이의 중심으로 잠적하려고 생각해 엉덩이가 뒷주머니 안감에 닿고, 동전의 한 면이 입체로 깨어날 때 동작을 멈춘 멜론과 달랑거리는 블루베리의 귀
커터의 끝이 반죽 단면에 스며들었어 공기에 난 구멍들이 눈을 감았어
멜론이요? 블루베리예요? 방 있어요? 빵 있어요? 빵 속에는 비상구가 없고 쇼윈도 케이스 라인을 탄 목소리가 부푸는 동안
몬순 같은 크림 속 방향이란 잃어버리기 위한 것 나를 찾아봐 크림에서 빵까지 엉덩이가 무너지듯
한상신 시인 / 빗방울, 유폐된 자의식의 변주
오늘처럼 비가 오면 커피를 내리게 된다. 빗방울 맺히는 창가로 커피를 들고 가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여러 생각이 깃들어 시간 가는 줄 모를 때가 많다. 그런데 시편 「빗방울 랩소디」는 내가 아는 비의 분위기와 기미가 사뭇 달랐다. 시인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빗방울에 다가간다. 시인의 감각과 사유는 닿기 힘든 곳까지 가 있으려고 카랑카랑한 소리를 내면서 새롭게 맺히는 빗방울이 된다.
시는 ‘우산’과 ‘감옥’으로부터 사유를 전개한다. 이 두 소재는 낯선 각도로 중첩하며 독자를 곧장 빗방울 속에 투옥하고, 이어 “비를 펼치면 우산이 되지만 우산을 펼치면 감옥”이라며 분위기를 무채색으로 조율한다.
‘빗방울’은 성실한 객관적 상관물이다. ‘빗방울’의 이미지는 시에 운동성을 부여하며 주조를 형성한다. “비를 펼치면 우산이 되는”에서 보듯 빗방울이 펼쳐지는 모습에서 “절반은 나의 울음”인 빗방울이다가, “넘치는 웅덩이”의 이미지를 거쳐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젖어서 죄가 되는 빗방울/ 용서가 잠겨있는 빗방울”이라는 이미지에 도달한다. 빗방울들의 이런 변주는 가볍지 않다. 각 이미지는 서로 간섭하면서 전혀 새롭게 변형·생성된다.
“비를 펼치면 우산이 되지만 우산을 펼치면 감옥이 된다”는 구절과 “우산은 비를 따라 용서 바깥으로 떠난다”는 구절은 이미지들의 조밀한 관계를 보여주며, 화자의 죄의식을 중심으로 ‘비(빗방울)’와 ‘우산’과 ‘감옥’의 이미지들이 이합 집산한다. 즉, 화자가 비를 펼침으로써 우산이 되며 우산을 펼침으로써 ‘감옥’이 된다. 우산을 쓰는 행위를 통해 화자는 세상과 분리되며 고립을 느끼는데, 화자가 체감하는 고립된 공간이 다름 아닌 ‘감옥’이다. 화자의 인식이 ‘감옥’으로 연결된다는 것은 그가 어떤 죄의식에 이미 스스로 구속되어 있었음을 뜻한다. 화자의 죄의식은 폭우로 말미암은 고립감의 농도가 짙어지면서 강화된다. ‘감옥’이란 공간은 화자의 잠재의식으로부터 발현된다. 쇠창살 소리는 장신구에서 나는 소리의 비유로 읽히기도 하지만,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로도 읽힌다. “소나기 속의 소나기 나만 흠뻑 젖는다”에서 화자의 죄의식이 짙어지고, 죄의식은 ‘감옥’과 ‘빗방울’의 이미지로 순환한다.
화자의 내면은 땅의 심장에 커다란 구멍을 낼 빗방울과 넘치는 웅덩이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드러난다. 빗방울은 화자를 세차게 때리고 보도블록에 떨어져 웅덩이에서 넘친다. 화자의 울음이 되기도 하는 그것은 땅의 심장에 커다란 구멍을 낼만큼 커다란 에너지를 축적하고 있다.
“빗방울 여러분!/ 심장이 없고 웃기만 하는 물의 가면을 벗기시겠습니까/ 젖어서 만신창이가 된 표정을 바라만 보아도 되겠습니까”에서 화자의 창백한 육성을 들을 수 있다. 화자의 내면에서 발원한 자의식이 “물의 가면”과 “만신창이가 된 표정”으로 투영되면서 이미지의 망을 구성하며 시의 절정을 향한다.
시에서 명사로 행이 끝나는 문장은 넷이다. 문장의 배치와 구조 측면에서 보면, 전반부의 “비를 펼치면 우산이 되지만 우산을 펼치면 감옥”과 “검은 우산과 정차하지 않는 버스 바퀴와 폭우가 만들어 내는 피날레”는 흐름상 끊김이 없다. 그에 비해 후반부의 “젖어서 죄가 되는 빗방울/ 용서가 잠겨있는 빗방울”은 일단 호흡을 끊고 있다. 호흡이 긴 다른 행들에 비해 두 행이 하나의 연을 구성하면서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노린다.
‘빗방울’은 행을 닫는 동시에 크고 깊은 의미의 진폭을 일으킨다. “젖어서 죄가 되는 빗방울/ 용서가 잠겨있는 빗방울”에서 화자의 정서는 더 고조된다.
우산과 감옥의 관계도 안에는 죄와 용서의 관계도를 품는다. “우산은 비를 따라 용서 바깥으로 떠난다”는 마지막 행에서 ‘빗방울’의 이미지는 완성이 된다. 갑작스럽게 세상으로부터 유폐된 우산이라는 공간, 슬픔과 죄의식으로 젖었던 비좁고 어두운 공간에서 화자는 ‘용서’를 발견하고 “용서 바깥으로 떠나”는 우산을 발견한다.
좋은 시편을 따라 한 ‘빗방울’ 안과 밖으로의 여행이 쉽지만은 않았으나 새로운 비에 흠뻑 젖는 기쁨을 누렸다. 시가 아니었다면, 누군가가 이런 빗방울의 감옥에 갇혀 있는 세상의 기분을 어떻게 보고 느낄 수 있었으랴. 커피를 한 잔 더 내려야겠다.
한상신 시인 / 찬 음식을 먹는 날
바람이 불면 아궁이와 굴뚝이 숨어버립니다 연기들은 나무들의 깊은 몸 속에서 숨어 있고 하루는 굴뚝 없는 집이 됩니다 숟가락들은 차갑고 겨울 쪽의 채소들로 반찬을 한 차가운 밥상 동지冬至가 지나고 백오일째 되는 날 바람은 아직 차갑고 햇살은 따스합니다
첫 씨앗으로 가늘고 짧은 바람을 심습니다 가족들은 식어버린 아궁이 하나씩 들고 바람의 눈치를 살피곤 합니다 꺼진 불씨를 새롭게 점화하듯 아버지는 허물어진 봄을 찾아다니며 수리를 합니다 찬밥을 먹는 날 마을은 아궁이를 숨겨놓고 빈 굴뚝이 되는 냉절冷 또는 숙식熱食이라고도 하는 명절입니다 겨우내 해토된 식은 관계들을 손질하고 찬밥 나누어 먹습니다 제철 꽃잎을 따서 화전을 만들고 두견주를 곁들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봄볕을 끊어다 새 옷을 조릅니다 오래 된 불에는 온갖 형상의 연기가 숨어 있다고 합니다 산으로 돌아가려는 연기들이 식은 아궁이 앞을 서성인다고 합니다 이맘때 산에서는 연기 없는 불길이 한창입니다 찬 음식을 먹는 날 마을과 사람들은 최초의 온기가 됩니다
한상신 시인 / 미필적 고의에 따른 메모
구멍이 쏟아졌어요 로션 뚜껑을 열어 거꾸로 들었을 때요 따개비처럼 눌러앉아있던 자리가 납작했어요
손바닥에 붙여도 보고 떼어도 보았어요 구멍을 길들이는 메모가 어디 있을까요
흐름을 아는 공병이었어요
한 방울 남짓 구멍을 터는 것은 공병의 기술 사라진 배후에 관하여 손바닥에 올려놓고 시간을 번복하고 반복하는 동안
흔들면 흔들릴 것이라는 누군가 있을 거란 생각은 텅 빈 생각이었어요
느려지는 공병을 건드리듯 툭, 툭, 동백나무 그늘로 동백꽃이 떨어졌어요 손바닥이 내려앉은 창가에서요 어쩌다 어쩌다 동백꽃 탐문이 길어졌네요
빈방 구석에 슬어 있는 구멍의 한때 고의가 아니듯 공병을 다시 시작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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