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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운자 시인 / 말의 눈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9.

정운자 시인 / 말의 눈

 

 

말을 보았다

진눈깨비 내리는 밤의 아스팔트 길

미끄러운 비탈길을

추억을 만들어가는 몇사람을 싣고

어제 걷던 길을

오늘 다시 걷는다

아침에 걷던 길을

저녁에 다시 걷는다

차라리 말은 길을 끌고 간다

초원을 달려야 할 말들이

노역에 바치는 지푸라기의 하루

말의 눈은 검다

말의 눈은  크다

검고 큰,

기쁨에 바치는 노래보다

슬픔의 가슴에 닿는 고통처럼

터벅거리는 말발굽소리가

가슴을 밟고 지나간다

파랗게 다시 돋아오르는

새싹들

검고 큰

그 눈

 

-시집 《당신에게 말걸기》(2007)

 

 


 

 

정운자 시인 / 스님의 빗*

 

 

옹심이를 넣은 들깨 미역국이 빗소리에 착착 감겼다

저녁 예불이 행해지는 동안

비는 회화나무 어린잎들을 깨워

겨울의 더께를 걷어낸다

어둠을 닦은 등불이 황금빛이다

숟가락을 달그락거리며 저녁이 젖는다

나는 눈을 감고 전생을 넘어 또 그 전생의 자락까지

회화나무 가지마다 염원을 매달고 흔들린다

그 덩어리가 캄캄하고 차갑다

동글동글한 옹심이가 잇몸에 닿는다

눈감고 코 막고 닫힌 곳에서 귀를 열어

빈 것을 담은 티끌의 소란을 맛본다

괘종시계가 아홉시를 알린다

나는 어떻게 오늘의 내가 되었을까*

사소한 바람에도 구르는 먼지의 쓸모를 생각하는 밤

 

*조계사에서 운영하는 밥집, 승소,

*푸코의 말,

 

-계간 《문학과 사람》 2019년 가을호

 

 


 

 

정운자 시인 / 기침

 

 

쏟아놓은 엊저녁 가재도구들, 외면하고 싶은 너의 말들

나는 자꾸 누르려고 하고 너는 자꾸 꺼내려고 한다

힘없는 내가 이만하면 되지 이만하면 되지 하며 달래는 동안

비온 뒤 바닥을 움켜쥐고 올라온 꽃대에서 피어나는 흙냄새

내용물이 가득차 잘 닫히지 않는 병뚜껑처럼 폭풍을 매단다

한 번만 들어달라고 귀담아 달라고 목을 찢으면서 저 밑바닥부터 왈칵,

 

 


 

 

정운자 시인 / 화요일의 날씨​

 

 

마주 오는 남자가 방금 프린트 된 자기 얼굴을

손수건에 담아 건넨다

횡단보도 흰 줄과 검은 줄이 번갈아 말을 바꾼다

스템프처럼 내 어깨에 찍히는 강렬한 무관심

화요일 출근길에, 플라타너스 손바닥이 날린다

확률 20퍼센트, 서울 경기에 가벼운 기별처럼

5내지 20밀리 작년에 오지 못한 비가 예약되었다

요즘은 버스를 타면 멀미가 난다

살아있는 남자와 살아남은 여자가 방금 떠난 자를 환송하러 간다

시무룩한 하늘, 속 쓰린 하늘

어제 뱉어 내지 못한 이별이 팽창한다

길은 어디까지나 이어질 듯 서로의 그늘을 찍는다

오른손에 단단하게 거머쥔 가방 밑바닥에서 슬픔이 이완된다

종종거리며 비가 오기 시작한다

무관심이 구름을 덮었으므로,

복제된 환대가 눈부시다

 

 


 

정운자(鄭雲慈) 시인

1967년 강원도 태백 출생. 강릉대학 미술학과 졸업. 2013년  계간 <다층> 봄호 2회 추천 완료. 현재 다층, 다층문학회 동인, 양주작가회의 회원, 한국작가회의 양주지부 회원. 수채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