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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열 시인 / 지하철의 밤
발가락 사이를 빠져나간 모래 세파 밀려가고 밀려드는 움푹 패인 곳 땀방울이 핏빛 노을로 고인다
수많은 발들의 전쟁 철고래등에 불빛 달고 달리는 늦은 밤 내일의 불투명한 꿈 싣고 간신히 얹혀 있는 가장이라는 책임표 철바람에 휘청거린다
현실과 이상의 차이가 얼룩을 만들지만 까맣게 쏟아지는 밤비늘 사이로 꼬리 잘리고도 세차게 도망치는 슬픈 도마뱀이다
장충열 시인 / 부채를 부치며
푸른 바람에로의 이동- 눈을 번뜩이며 달려드는 더위를 힘껏 밀어낸다
묵향을 따라 주름살 펼쳐 대숲을 달린다 추상명령 같은 옛 시인의 궁서체가 눈앞에 죽창으로 꽂힌다 순간, 생각의 끝을 깨우며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어릴 적, 외가 뒤란에 키 작은 대나무가 여러 그루 있었다 푸른 잎새, 선명한 모양, 매끄러운 몸통에 촉감이 좋았던 기억들 유난히 좋아해서 지금도 대나무통만 보면 집어 든다 버릴 것 하나 없는, 곧은 심지의 뿌리 깊은 나무를 닮으라 하셨던 아버지의 말씀을… 삶의 배경으로 만들지 못한 부끄러움이 늘 소화불량이다
보이는 것만 좋아하고 그 깊은 의미를 새겨두지 못한 어리석음이 부채살을 울린다 어제의 복잡한 일들 잠시, 쉼표를 찍어두고 살갗을 어루만지던 그 옛날의 바람결을 느낀다 화선지를 시원하게 대밭으로 만드시던 아버지의 모습 그 목소리 메아리진다.
-『미네르바』 2012-가을호 <신작시>에서
장충열 시인 / 계단
위 칸과 아래 칸 사이에서 복잡한 마음 비우면 차분하게 정리되는 이어짐의 단계를 만난다 올려다보기도 하고 내려다보기도 하는 간격의 미학
바람도 방향을 잡고 달려가고 꽃도 시기를 보며 웃음을 터뜨린다 생의 어느 것 하나 욕심 없는 것이 없겠지만 한 계단, 한 단계 진실한 채움이 결 고운 생이 된다는 걸.
장충열 시인 / 나를 탄주하다
바다는 푸른 캔버스에 하얀 포말 필기체로 시간을 되돌려 편집중이다 비릿한 해풍은 오래 접혀 있던 기억의 터널부터 다림질하고 있다 노을을 휘감은 검푸른 물살은 지난날과 오늘을 흔적 없이 포개며 호흡을 가쁘게 한다
무채색의 그림들은 잠결까지 파고들었던 유채색의 날들을 바람의 기호로 불러내고 있다 사랑의 깊이는 쉼 없는 썰물과 밀물의 반복 속에서 성숙해진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바다에서는 누구나 자신만의 은어로 이야기하며 갈매기도 훔쳐갈 수 없는 보석 하나쯤 숨겨 놓아야 한다
탈출하듯이 젊음으로 달려가는 바다 벌거벗겨진 회상 속에서 안과 밖을 맴도는 투명한 유혹을 즐긴다 모래톱에 걸린 파도의 변명이 궁색해지기 전에 잠들 수 없는 철썩임으로 목마른 페이지를 적신다 기억의 윤슬, 선율로 펼쳐 청신호를 켜는 바다
장충열 시인 / 더덕
좌판에 쭈그리고 앉은 노파의 거칠어진 손끝에서 하얗게 벗겨지는 속살이 탱글거린다 너절한 생의 덧개를 벗겨버린 흔적이 보인다
온통 주름뿐인 얼굴에 진한 응달이 묻어나는데 흙을 털어내고 다듬는 시간의 부지런함이 지폐로 바뀌면 저 얼굴 가득히 미소가 번지리라 오천원짜리 한 봉지를 사며 할머니의 고독까지 나눠담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어쩌면 슬픈 듯 숨겨진 눈빛 속엔 외로움을 즐기는 법을 아실지도 모른다 욕심에 따라 만족이 다르다는 것을 잊기도 하지만 마음을 비웠을 때 채워지는 기쁨은 더덕의 향보다 진하리라
‘오늘 저녁은 더덕구이다’ 그 맛, 달빛보다 감미로우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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