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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안이삭 시인 / 새벽소리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12.

안이삭 시인 / 새벽소리

 

 

지하철 4호선

사당역 막 지나

 

옆자리 앉은 중년 남녀가

어릴 적 친구들 하나하나 들춰가며 같이

동창회 가는 중 나누는 대화를

흐뭇하게 엿듣고 있는데

 

자지러지는 아기 울음소리

확 귀를 당긴다

 

대화가 뚝 끊어지고

졸고 있던 맞은편 젊은 여자도 눈을 뜬다

이제 겨우 백일 정도나 되었을까

 

쏟아지는 시선에

쩔쩔매고 있을 엄마는 아랑곳없이

울음소리는 우렁차고 나는 즐겁다

얼마만에 들어보는 거침없는 소리냐

눈치도 안 보고

거짓도 없는

저 첫새벽 세상 건너는 소리

 

 


 

 

안이삭 시인 / 월배月背에 여자가 산다

 

 

주황색 치마를 입은 여자가 있어요

 

목 긴 꽃무늬 얇은 믈라우스가 어깨를 조금 돌려요

무슨 말인가 내게 한 것 같은데

입만 둥그렇게 뻐끔거리네요

 

색색의 헝겁을 잇댄 조각이불을 만들던 중이었어요

따뜻한 색깔이 필요한 자리마다

구멍이 숭숭 뚫려있었죠

 

늦은 여름이었고 졸음이 몰려왔어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불을 덮고 조각난 꿈을 꿔요

칸나가 경고등처럼 켜진 마당이었죠

 

가끔씩 뒷모습이 궁금했어요

뒷짐 지고 있는 손에 무엇이 들려있는지 보고 싶었어요

등 뒤에서 비치는 달빛만 만지작거리는 줄 알았으면

모르는 척 했을 건데요

 

빛 바랜 주황색 치마를 넓게 펼쳐놓은 저녁 이예요

 

 


 

 

안이삭 시인 / 기침

 

 

언제였을까

무엇이었을까

누구도 모르게 들어왔다가

기척 없이 잦아들었다면

지금 이렇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지는 않을 터

 

제가 갇힌 줄을 알고

불안하게 뒤척이며 엿보는

엿보다 터져 나오려고 하는

목줄기를 누르고 등을 꺽으며

바닥까지 뒤집을 듯 밀어붙이는

 

열기와 눈물

가슴 뻐근한 통증 후에도

끝내 뱉어 내지 못한

저 안 깊숙한 곳에 붙잡혀

가르릉 거리는

거기!

거기 있는 너!

 

 


 

 

안이삭 시인 / 검고 딱딱한 길 위를 건너가던 중이었다

 

 

사람이 신기한 듯 내려다본다

나도 잠깐 발을 멈추고 눈을 마주친다

지나가던 구름도 무슨 일인가 기웃거린다

 

정지한 풍경 속으로 달짝지근한 냄새가 스민다

 

누가 나를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깊이 들여다본 적이 있었던가

 

그의 몸은 하나의 거대한 물기둥이다.

조금만 더 허리를 굽히면

출렁거리다가 쏟아질지도 모른다

 

나는 가던 길을 간다

내가 가는 곳은

보라색 봄까치꽃 사이로 열린 둥글고 말랑말랑한 세계

 

그도 몇 발짝 망설이다가

가던 길을 간다

물웅덩이에 종아리까지 담그고 해찰하던 그림자가

얼른 쫓아간다

 

사람의 길과 도마뱀의 길이 잠시 만났다가 헤어지는 순간이다

 

 


 

 

안이삭 시인 / 우기

 

 

나의 어깨는 피아노 건반이라 하고

그대의 손가락이 연주를 시작했다고 하고

 

노래를 못하는 나는

유리구슬 하나씩 뱉어낸다 하고

 

돌아눕다가 엎어지다가도 결국 일어서는 것을

뿌듯이 기쁨이라 하고

 

온몸을 진저리치며 그대를 보내는 것은

너무 무거워서라 하고

 

비가 너무 잦아 꽃이 안 될 거라는 소문 같은 거

나는 안 믿는다 하고

 

잠깐 비 그친 하늘

둥글게 끌어당겨 품은 물방울

연잎 푸른 잎맥 따라 구른다 하고

 

-서울신문 2014년 7월 26일 토요일>에서

 

 


 

 

안이삭 시인 / 나르키소스의 샘물가

 

 

누구라도

거울 한둘쯤은 갖고 있을 것

좋은 거울이란

나를 착실히 읽어주는 것

어쩌면 내 흉터조차도 짚어주는 것

점점 깊이를 더해가는

구겨진 그림자까지

낯설지 않게 익혀주는 것

 

또한 좋은 거울이란

가끔씩은 모르는 척하는 것

화장이나 빛의 각도에 따라

잘못 읽기도 하는 것

 

생의 불꽃같은 접점

넘어설 수도 물러설 수도 없었던

차가운 경계

 

거울 앞을 떠난 뒤

거울이 나를 읽을 수 없듯이

나 또한 거울을 그리워하지는 않을 것

나르키소스의 샘물가

혼자 남겨진 저물녘을 견디어볼 뿐

 

 


 

안이삭 시인

1961년 대구에서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1 《애지》 여름호에 <초록방울제사장>외 4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한 물고기가 한 사람을 바라보는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