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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용 시인 / 사랑 ―채연(彩娟)에게
2박3일 강원도 횡성으로 여름성경학교 수련회를 간 아홉 살짜리 둘째 딸아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빗방울처럼 울먹울먹 끊어지는 소리 습하고 뜨거운 너울로 오는 소리 아비의 눈을 흐리게 하는 소리
아직 일어서지 못한 꺼이꺼이 고부라진 단어들이 수화기 안에서 몸을 떨고 있었습니다
-시집 『나비가 지나간 자리처럼』에서
김선용 시인 / 함께 가자, 이 길을
나에게 북한산 둘레길은 서른일곱 개의 별들이 만든 새로운 길이다 늦가을, 초겨울에 씨 뿌린 꽃길이며 스무 살의 숲으로, 바다로 가는 오솔길이다 별들이 빛나는 것은 별과 별을 바라보는 자가 꿈을 꾸기 때문에 빛나는 거다 숨을 쉬기 때문이다 별은 하늘에만 떠 있는 게 아니다 별은 우리가 걷는 이 길에도 있다 걷는 자여, 발밑을 보아라 움이 트지 않느냐 우리들은 어린 날 밤하늘의 별을 멀리서 보았다 이제 너희들은 이 길을 지나 그 별이 될 거다 희망이란 이름으로 꿈에 다가갈 거다 미래는 오는 허상(虛像)이 아니라 지금 걷는 이 길을 걸어감으로 너희가 만나야 할 실체이다 그 무엇이든 흠뻑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이제 환장하도록 그리워질 저 겨울 햇살에, 살아있어 부는 바람에 너희들의 속눈썹을, 머릿결을, 마지막 솜털을 젖은 녀석은 말려 보고 마른 녀석은 다시 적시며 함께 가자, 이 길을
-시집 『나비가 지나간 자리처럼』에서
김선용 시인 / 뜨거운 풍경
2012 마지막 고입 선발고사 1교시 감독 눈다운 눈이, 설레는 첫눈이 펑펑 내리던 날 산과 도시를 덮고 학교 운동장을 홑이불처럼 덮은 날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대여섯 명 아이들이 신발을 끌며 때로는 나뭇가지로 큼지막하게 써놓은 원시문자 S E X 소현 ♡ 광호 몸서리치게 몸과 마음이 추운 날 화끈하게 노는 저 아이들 학교 운동장에 거하고 무식하게 싸갈긴 욕구 어쩔 수 없이 백색의 운동장 위에 싸버린 거칠고 무서운 욕망 대책 없이 뜨거운 소현 ♡ 광호 속닥거리며 키득거리며 내리는 눈발이 민망하고 두려워 몇 녀석은 글씨를 피하고 몇 녀석은 펑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이 되어 폭 폭 폭 덮고 있었다 -시집 『나비가 지나간 자리처럼』에서
김선용 시인 / 어머니의 초상(肖像)3
고추밭 마늘밭 ㄱ자로 고부라진 곱사등이
밭고랑에서 한평생 인생을 읽어도 읽어도 까막눈 울엄니
어디선가 소쩍새가 운다 가 갸 거 겨 고 교 구 규
엄니 등뒤로 여든 네 고개 고부라진 해가 고추밭 마늘밭 맵다 맵다 노을로 운다
김선용 시인 / 민달팽이
냇가의 돌 위를 민달팽이가 기어간다 등에 짊어진 집도 없는 저것 보호색을 띤, 갑각의 패각 한 채 없는 저것 타액 같은, 미끌미끌한 분비물로 전신을 감싸고 알몸으로 느릿느릿 기어간다 햇살의 새끼손가락만 닿아도 말라 바스라질 것 같은 부드럽고 연한 피부, 무방비로 열어놓고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것인지 냇가의 돌침대 위에서 오수(午睡)라도 즐기고 싶은 것인지 걸으면서도 잠든 것 같은 보폭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꼭 술통 속을 빠져나온 디오게네스처럼 물과 구름의 운행을 따라 걷는 운수납행처럼 등에짊어진 집, 세상에 던져주고 입어도 벗은 것 같은 납의(衲衣) 하나로 떠도는 그 우주율의 발걸음으로 느리게 느리게 걸어간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내가 냇물에 씻고 있는 배추 잎사귀 하나를 알몸 위에 덮어주자 민달팽이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귀찮은 듯 얼른 일사귀 덮개를 빠져나가버린다
치워라, 그늘!
김선용 시인 / 깡통에 입맞추고 싶다
수업 하다가 어느 결에 와 버린 교실 뒤편 재활용통 속에 가득이 담긴 빈 깡통들
얼마나 맛있었을까 얼마나 속이 탔을까 마시며 얼마나 까르르 웃었을까 아름다운 십대여
우리도 저 음료수처럼, 깡통처럼 그대들의 갑갑한 가슴을 적셔줄 수 있다면 너희들에게 톡 쏘는 웃음을 줄 수 있다면 달콤하고 향그러움으로 남을 수 있다면
문득 그대들의 입술 닿은 깡통에 입맞추고 싶구나 그리하여 한 방울의 푸르름으로 내 목숨도, 가슴도 적시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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