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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선용 시인 / 사랑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12.

김선용 시인 / 사랑

―채연(彩娟)에게

 

 

 2박3일 강원도 횡성으로 여름성경학교 수련회를 간 아홉 살짜리 둘째 딸아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빗방울처럼 울먹울먹 끊어지는 소리

 습하고 뜨거운 너울로 오는 소리

 아비의 눈을 흐리게 하는 소리

 

 아직 일어서지 못한 꺼이꺼이 고부라진 단어들이 수화기 안에서 몸을 떨고 있었습니다

 

-시집 『나비가 지나간 자리처럼』에서

 

 


 

 

김선용 시인 / 함께 가자, 이 길을

 

 

나에게 북한산 둘레길은

서른일곱 개의 별들이 만든 새로운 길이다

늦가을, 초겨울에 씨 뿌린 꽃길이며

스무 살의 숲으로, 바다로 가는 오솔길이다

별들이 빛나는 것은 별과 별을 바라보는 자가

꿈을 꾸기 때문에 빛나는 거다

숨을 쉬기 때문이다

별은 하늘에만 떠 있는 게 아니다

별은 우리가 걷는 이 길에도 있다

걷는 자여, 발밑을 보아라

움이 트지 않느냐

우리들은 어린 날 밤하늘의 별을 멀리서 보았다

이제 너희들은 이 길을 지나 그 별이 될 거다

희망이란 이름으로 꿈에 다가갈 거다

미래는 오는 허상(虛像)이 아니라

지금 걷는 이 길을 걸어감으로 너희가 만나야 할 실체이다

그 무엇이든 흠뻑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이제 환장하도록 그리워질 저 겨울 햇살에,

살아있어 부는 바람에

너희들의 속눈썹을, 머릿결을, 마지막 솜털을

젖은 녀석은 말려 보고 마른 녀석은 다시 적시며

함께 가자, 이 길을

 

-시집 『나비가 지나간 자리처럼』에서

 

 


 

 

김선용 시인 / 뜨거운 풍경

 

 

2012 마지막 고입 선발고사 1교시 감독

눈다운 눈이, 설레는 첫눈이 펑펑 내리던 날

산과 도시를 덮고

학교 운동장을 홑이불처럼 덮은 날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대여섯 명 아이들이

신발을 끌며 때로는 나뭇가지로

큼지막하게 써놓은 원시문자

S E X

소현 ♡ 광호

몸서리치게 몸과 마음이 추운 날

화끈하게 노는 저 아이들

학교 운동장에 거하고 무식하게 싸갈긴 욕구

어쩔 수 없이 백색의 운동장 위에 싸버린

거칠고 무서운 욕망

대책 없이 뜨거운

소현 ♡ 광호

속닥거리며 키득거리며 내리는 눈발이

민망하고 두려워

몇 녀석은 글씨를 피하고

몇 녀석은 펑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이 되어

폭 폭 폭 덮고 있었다

​-시집 『나비가 지나간 자리처럼』에서

 

 


 

 

김선용 시인 / 어머니의 초상(肖像)3

 

 

고추밭

마늘밭

ㄱ자로 고부라진

곱사등이

 

밭고랑에서 한평생

인생을 읽어도 읽어도

까막눈 울엄니

 

어디선가

소쩍새가 운다

가 갸 거 겨

고 교 구 규

 

엄니 등뒤로 여든 네 고개

고부라진 해가

고추밭 마늘밭 맵다 맵다

노을로 운다

 

 


 

 

김선용 시인 / 민달팽이

 

 

냇가의 돌 위를

민달팽이가 기어간다

등에 짊어진 집도 없는 저것

보호색을 띤, 갑각의 패각 한 채 없는 저것

타액 같은, 미끌미끌한 분비물로 전신을 감싸고

알몸으로 느릿느릿 기어간다

햇살의 새끼손가락만 닿아도 말라 바스라질 것 같은

부드럽고 연한 피부, 무방비로 열어놓고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것인지

냇가의 돌침대 위에서 오수(午睡)라도 즐기고 싶은 것인지

걸으면서도 잠든 것 같은 보폭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꼭 술통 속을 빠져나온 디오게네스처럼

물과 구름의 운행을 따라 걷는 운수납행처럼

등에짊어진 집, 세상에 던져주고

입어도 벗은 것 같은 납의(衲衣) 하나로 떠도는

그 우주율의 발걸음으로 느리게 느리게 걸어간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내가 냇물에 씻고 있는

배추 잎사귀 하나를 알몸 위에 덮어주자

민달팽이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귀찮은 듯 얼른 일사귀 덮개를 빠져나가버린다

 

치워라, 그늘!

 

 


 

 

김선용 시인 / 깡통에 입맞추고 싶다

 

 

수업 하다가

어느 결에 와 버린 교실 뒤편

재활용통 속에 가득이 담긴 빈 깡통들

 

얼마나 맛있었을까

얼마나 속이 탔을까

마시며 얼마나 까르르 웃었을까

아름다운 십대여

 

우리도 저 음료수처럼, 깡통처럼

그대들의 갑갑한 가슴을 적셔줄 수 있다면

너희들에게 톡 쏘는 웃음을 줄 수 있다면

달콤하고 향그러움으로 남을 수 있다면

 

문득 그대들의 입술 닿은

깡통에 입맞추고 싶구나

그리하여 한 방울의 푸르름으로

내 목숨도, 가슴도 적시고 싶구나

 

 


 

김선용(金善庸) 시인

충남 태안 출생. 1998년 명지대학교 대학원 국어교육학 석사 졸업. 1996년 계간 《문예와 비평》 여름호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소금인형의 사랑』 『나비가 지나간 자리처럼』 등. 경복여고, 진명여고, 경민고등학교를 거쳐 현재 경기도 의정부 소재 경민중학교 국어교사. 국제 PEN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 회원으로 활동. 의정부문학상, 경기도문학공로상, 의정부시표창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