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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유재영 시인 / 분홍 그늘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12.

유재영 시인 / 분홍 그늘

 

 

소나기

지난 자리

여뀌 꽃

분홍 그늘,

조붓한 봇도랑에

무슨 잔치 났나 보다

갈갈갈

새물내 맡고

모여드는

피라미 떼

 

-유심 2015. 10월호

 

 


 

 

유재영 시인 / 옷 벗고 마중 나온

 

 

옷 벗고 마중 나온

산그늘이 좋아서

 

선운사 툇마루

녹찻빛 한나절은

 

난보다 푸른 고요가

가부좌로 앉는다

 

-오늘의 시조 2022년 제16호

 

 


 

 

유재영 시인 / 구름 농사

 

 

일용할 이슬 몇 홉,

악기 대용 귀뚜라미 울음 몇 말,

언제고 타고 떠날 추녀 끝 초승달,

책 대신 읽어도 좋을

저녁 어스름

아,

그 집에도

밥 먹는 사람 있어

하늘 한 귀퉁이 빌려

구름 농사 짓는다

 

-시집 『구름농사』에서

 

 


 

 

유재영 시인 / 등고선을 중심으로 한 서정적 비유 5

 

 

1.

구름, 바람, 허공까지 하늘 권속 다 모여

누르면 튕겨날 듯 파랗게 휘는 봄날

어제 핀 생강꽃 곁에 휘파람새로 앉고 싶다

 

2.

목 마른 산노루가 잠시 쉬다 떠난 자리

옹달샘 물, 한 모금에 산도 따라 젖는다

우전차雨前茶 그 뒷맛 같은, 절명 시 한 줄 같은

 

3.

햇빛 널어 말리는 너럭바위 한나절은

가래나무 그늘도 겹으로 내려와서

깊어진 물소리들이 풀빛으로 얼룩지네

 

4.

사는 일이 그렇다면 죽는 일도 마찬가지

멧비둘기 푸득 날자, 급강하는 황조롱이

생과 멸, 짧은 순간이 자막처럼 흘러간다

 

5.

등고선도 오그라든 미간 좁은 골짜기

조생한 새끼 등을 고루고루 핥아주는

어미의 거친 숨소리 그런 밤도 있으리

 

 


 

 

유재영 시인 / 우리 生 무엇이 되어

 

 

1.

주인공이 사라진 허전한 화면처럼 멈칫멈칫 흘러가다 뒤

돌아 본 흰 구름, 우리 生 무엇이 되어 다시 올까 그 봄날로,

 

2.

소쩍새 우는 밤은 바위도 몸을 열어 달려 나온 물소리가

빈산마저 흔드는가, 내일은 그 무덤가에 진달래꽃 더 붉겠다

 

-《시조시학》 2022년, 봄호

 

 


 

 

유재영 시인 / 이슬 세상

 

 

이슬들이 모여서 쪽방촌을 이루었다

아침을 물고 온 새 물똥처럼 새하얀

물방울 은빛 사리가 가지런히 눈부신 곳

 

오늘의 초대 손님 실잠자리, 구름 한 점

터줏대감 소금쟁이, 청개구리, 까마중

조금은 옹색하지만 불평 없이 동거하는

 

주인도 세를 사는 하늘이 맑은 동네

온 몸을 톡! 던져서 풀잎 발등 적시는

작아서 더 좋은 것, 저 깨끗한 전신공양

 

 


 

 

유재영 시인 / 추사판전진경(秋史板殿眞景)

 

 

몽당붓 일천 개에 구멍 뚫린 벼루 열 개

선생 병중 칠십일과(七十一果) 돌아보면 길 밖의 길,

죽음도 두렵지 않는 일흔한 살 필법이여

위리안치 세월만큼 금욕의 마른 갈필

세한의 칼바람도 붓 한 자루 못 꺾었다

정좌한 선생 일생은 척추 곧은 조선 정신!

운명처럼 받아든 판전(板殿)*이란 두 글자

모든 욕심 내려놓고 동자승 보법으로

마지막 파임을 긋자 피가 뛰는 대동맥

 

*판전(板殿): 추사 돌아가시기 사흘 전에 쓴 서울 봉은사 화엄경판각 현액. 선생은 노년에 경기도 과천(果川)의 과지초당(瓜芝草堂)에 머물면서 봉은사에 자주 들리곤 했는데, 구전에 따르면 이 글씨를 사망하기 사흘 전에 썼다고 한다. 만년의 순수한 모습이 드러 나 있는 듯한데, 세간에서는 이 글씨체를 '동자체(童子體)'라고 부른다. 파란의 생애를 겪으면서도 학문과 서화에 침잠했던 선생의 진중 한 모습이 담겨 있는 듯하다. 편액 왼쪽의 낙관에 “칠십일과병중작(七十一果病中作, 일흔한 살의 과가 병중에 쓰다)”라고 했는데, 여기 에 '과果'는 선생이 노년에 과천에서 살면서 사용했던 호인 과도인(果道人).과노(果老).노과(老果) 등에서 나온 것이다.

 

-《가히》 2023. 창간호

 

 


 

유재영 시인

1948년 충남 천안 출생. 1973년 박목월(시)과 이태극(시조) 추천으로 등단. 시집 『한 방울의 피』 『지상의 중심이 되어』 『고욤꽃 떨어지는 소리』 등. 시조집 『햇빛시간』 『절반의 고요』 4인집 『네사람의 얼굴』 『네사람의 노래』 등. 중앙시조대상, 이호우문학상, 편운문학상, 가람상, 한용운 시인상 등 수상. 경희대학교 문과대학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