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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유점 시인 / 수취거부
대문은 열려있고 기척이 없다 개 조심 목패 달려있는 빈 편지함에 터를 잡는 딱새 사람보다 무서운 천적을 피할 수 있다 습기 찬 둥지에 마른 잎이 그리운 유월 장마 딱새는 굶주린다 비가 그치고 집배원이 방문한다 고지서를 우체통에 밀어넣는다 먹이를 구해온 어미 딱새 제 몸 보다 커다간 세금고지서를 찍어댄다 딱새는 꽁지를 딱딱거리며 주둥이도 딱딱거린다 딱새는 집배원에게 주민세를 내라고 되려 딱딱거린다 세속을 떠나 조용히 살아보려는 욕망 우편물 반송으로 겨우 지탱한다 내가 차라리 딱새가 된다
윤유점 시인 / 당신은 블루스타
5층 건물 공사장 일회용 가스하나 꺼낸다 물이 끓는 동안, 봉지를 뜯고 앞니로 스프를 찢는다 당신은 벽돌 10개를 옮긴다 손바닥이 빨간 장갑이 나무젓가락을 쪼갠다 내일은 신축 공사장으로 간다 경사 30도, 폭 50cm의 작업발판을 밟으면 벽돌 20장이 등판을 누른다 굳은살은 석회처럼 단단하다 계율처럼 줄맞춰 쌓던 벽돌들 경계를 넘어가지 않는다 벽돌 한 장 20원, 하루 일곱 시간 만에 절망으로 눕는다 다시 벽돌을 올리고 공중부양한다 당신의 왼쪽 엄지발톱이 살을 파고든다 블루 스타 부탄가스를 사들고 당신은 나타난다 허공은 항상 나에게 천국이다
윤유점 시인 / 밤에
속살 하얗게 시린 눈 내리다
암고양이 휙 지나간 자리
윤유점 시인 / 양귀비꽃이 있는 풍경
무도회에 초대받지 못한 몽상은 아득하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철문 앞에 되살아난 장미꽃 넝쿨이 들끓는다 식별할 수 없는 부족들이 지나간 자리 마초맨의 성지순례는 시작된다 잠든 노숙자의 얼굴을 고양이가 핥고간다 여자는 맨발인 채 지껄인다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동안 창 너머 먼 섬을 본다 까만 창틀에 걸린 하루가 나를 불러세운다 그대 뒷모습은 사라져 가고 환풍기는 돌아가다 멈춘다 헝클어진 어둠 속에서 로드킬 당하는 고양이 위에 바람이 쏟아진다 헤어날 길 없는 절망에 입을 다문 모의주행이 필요한 도로 고양이가 사라진 언덕길 너머 섬은 제 혼자 아득하게 떠 있다
윤유점 시인 / 빈집
첫눈에 혼절한 저녁 살아남은 슬픔을 본다 뼈대만 남은 철조망 낯선 이별은 옆구리를 찌른다 담이 걸린 것처럼 맹장이 터진 것처럼 통증 끌어안고 통증을 죽인다 살갗을 부비 던 살과 살 시간은 생의 흑점을 태우고 기댈 곳 없는 그리움에 혼미해진다 스며들 곳 없는 소용돌이를 핏발선 눈발이 짓밟고 간다 표정 없던 얼굴에 엷은 미소가 퍼진다 나직이 속삭이는 목소리 여보,당신 무슨 띠에요 고... 양... 이... 파르르 떠는 숨소리 발꿈치는 상처를 입지 않는다 혼자 떠드는 라디오 어깨 너머 손님이 온 모양이다 고양이처럼 다시 눈이 내린다
윤유점 시인 / 크리스찬 안데르센의 빵가게
핏발선 얼굴이 배달된다 날개를 잃은 새는 명멸하고 꿈꾸는 화가는 흐려진다 검은 경계선이 휘몰아치는 화폭 결핍된 사랑은 오븐에 넣고 슬픔은 등 뒤에 엎어 세운다 거품기를 휘젓는 팔은 어느새 회전그네를 탄다 달걀흰자와 설탕을 넣고 머랭을 젖는 사이 하얀 기억이 어디론가 사라진다 덩달아 거리의 집들이 저만치 날아간다 십자가 혼자 우두커니 서 있다 검은 그림자가 테두리를 벗어나는 경계에서 벽걸이에 걸려있는 절규는 핏대를 세운다 달려드는 달빛을 걷어차며 나는 눈을 마주 치는 화가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빈 하늘이나 본다 엷게 번지는 빵 냄새에 이스트와 딸기 향이 배어있다 나는 파스텔 톤으로 빵을 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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