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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애 시인 / 건조주의보
낡은 연립주택이 빼곡한 동네 그곳을 지나온 바람이 홀쭉하다 공원 한쪽 연둣빛 혀를 내밀기 시작한 느티나무 아래 뒤뚱거리는 걸음들이 지팡이를 앞세우고 모여든다 지루한 공원이 귀를 세운다 앞니 사이로 새어나오는 기침소리가 오가는 푸릇한 표정을 빨아들인다 손목의 살비듬을 비추는 햇살 몇 점에 뻣뻣한 관절을 지지고 시름을 말린다 손자의 재롱도 버거운 나이, 곁을 주지 않는 며느리와 메마른 공기를 피해 나온 마실이 묵묵히 벤치에 앉아 있다 바스러진 꿈의 사연이라든가 가물가물한 기억들이 촉 무뎌진 목소리에 실려 실타래처럼 풀린다 노구의 서글픔에 기우뚱거리는 감정이 붉어진 눈자위를 비비는 곳 안구건조증에 걸린 봄 오후 한나절이 기울어간다
신미애 시인 / 표정을 만드는 아이들 유랑의 도시 빤한 스토리가 흘러다닌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병으로 몸져누웠다 남루한 차림으로 준비한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아이들 무표정한 얼굴이 삐뚤게 쓴 글씨를 무릎에 올려놓는다 외면하는 승객들, 눈을 감거나 대부분 스마트폰에 매달려있다 이곳은 그들의 어장, 그럴듯한 미끼를 풀어놓는다 재빨리 낚아채도 대어는 없다 잔챙이라도 잡아야하는 생존전략 견고한 불안이 눈치를 키웠다 구걸을 챙겨들고 주름진 생으로 시작한 아이들은 달리는 길에서 하루치의 몫을 채워야한다 입구도 출구도 같은 곳을 떠돌며 부유하는 주소에서 몸을 웅크릴 것이다 어둠이 입을 벌리는 곳, 점점 깊은 절망으로 걸어 들어간다 지병을 앓는 도시, 또 누군가 다리를 절룩이며 구구절절 사연을 들고 다가온다 -『시와문화』 2013년 봄호
신미애 시인 / 등의 용도
신이 사람을 만들 때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고 걷는 것을 완성하니 너무 피곤했다 잠시 일손을 놓고 보니 사람에게도 쉴 곳을 만들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지친 몸을 눕히기 좋은 평평한 바닥을 생각하다가 넓적한 등을 만들게 되었다
그런데 조상들은 편히 쉬라고 만들어준 등 위에 삶의 무게를 얹어두었다 땔감을 지고 볏단을 나르고 우는 아이를 업어 포대기로 동여맸다 평생 지고 있던 등짐을 내려놓은 후 나무 관에 누워 비로소 굽은 등을 폈다
나는 그 등을 노동에 써 본 적이 없다 아이는 유모차에 태워 밀고 다녔고 등은 아이에게 잠깐씩 놀이터로 내주었을 뿐 내 등은 철저하게 게으름을 도와주기 위한 곳 등을 포근히 받아주는 소파에 기대 텔레비전이나 책을 보다가 온몸에 잠을 품기 일쑤다
나는 신의 뜻에 따라 살고 있다고 믿는다
신미애 시인 / 공기의 허파는 얼마나 큰가
갇힌 공기는 탄력적이지 누르면 물러섰다가 몸을 부풀려 원형으로 되돌아오지 물렁해서 쉽게 상처를 받지만 회복이 빠른 유전자들, 투명날개를 가진 에어air, 1리터의 무게는 1.29g 새끼손가락 끝에 걸 수 있는 체중으로 나른한 하품이나 할 거라 생각했지 그러나 공기는 무척 분주해 틈을 찾아 스미는 공기 내 몸속의 캄캄한 길도 알고 있지 집집마다 끓어 넘쳐 그을린 매캐한 아침저녁을 네모난 창문 밖으로 밀어내면 덥석 받아 안고 제 싱싱한 살점을 뭉텅 떼어주지 비리고 역한 것을 잘게 부수고 푸릇한 입자로 만들곤 하지 세상에서 가장 큰 필터, 공기의 허파는 얼마나 클까 공기는 탁해진 피를 걸러내며 새벽을 기다리지 세상의 문이 모두 닫히면 한밤중 손상된 공기의 장기臟器가 다시 재생되지
신미애 시인 / 악수의 조건
악수는 지위와 밀접한 관계 한 손을 내밀면 두 손으로 맞잡아야한다
명함과는 한 세트 어색함을 지우려 얼굴에 웃음을 바른다 불안한 침묵에 농담을 얹어 밀고 당기는 대화의 기술이 나열된다
분위기에 잘 스미도록 흠집 없는 동질감의 언어를 조립해야한다 예상치 않은 말로 얼굴이 화끈거려도 조바심을 포장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손과 손이 다정해지면 갈비뼈 사이에 깊이 숨겨둔 말이 튀어나온다 호탕한 웃음은 적절한 안주 오가는 술잔에 달콤한 말이 철철 넘친다
시선을 묶고 집중하는 탐색의 시간을 벗어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손을 씻고 족쇄 같은 넥타이를 푸는 것이다
신미애 시인 / 그 남자의 꽃밭
그의 집엔 꽃이 피지 않는다 친구들이 몰려와 사라진 글라디올러스나 장미를 들먹거리면 시큰둥하게 기억이 잘 안 나, 그렇다면 수국이나 목련을 심지 그래, 바빠서 나중에.... 그는 말을 흘린다
그의 꽃밭은 정말 사라졌을까 눈부신 꽃의 모가지가 어른거리고 눈살을 찌푸리며 그는 커튼을 친다 언제부턴가 햇살을 자르는 버릇이 생겼다 식탁, 소파, 침대에선 꽃향기가 나지않는다 너무 조용해 그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다 공기가 부딪히는 소리, 맥박소리, 자박자박 어둠이 걸어오는 소리, 거실에 무성한 말만 떠다닌다
얼마 전까지 그는 완벽했다 넘쳐나던 웃음과 나른하게 들뜬 공기를 믿었다 이름을 지우니 웃음도 차가워졌다 안녕! 붉은 입술이 가버렸다 갑자기 길이 끊어진 느낌, 말이 짧아지고 목덜미가 길어졌다 입술에 찍힌 무늬가 희미해졌다 시간이 고인다 술잔을 기울이면 까르르 웃음소리가 쏟아진다 멍하니 텔레비전을 응시하며 소파에 쪼그려 눕는다 벨은 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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