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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삼환 시인 / 우이령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15.

김삼환 시인 / 우이령

 

 

길이 길을 만나도 낯선 풍경 여전하다

오봉을 담고 있는 하늘은 여백이고

그대와 걸었던 길은 어디 숨어 있을까?

 

그립다 말을 하고 바라보는 눈길 끝에

잎이 마른 떡갈나무 그림자만 아득한데

석굴암 바람 소리가 우이령을 넘고 있다

 

-《문학저널》2022. 겨울호

 

 


 

 

김삼환 시인 / 숲의 소리를 읽다

 

 

장단음과 고저음이 마구 섞인 숲의 소리

유성음과 무성음이 수를 놓듯 펼쳐진다

바람은 숲의 소리를 무늬처럼 훑고 간다

 

한 생의 이력들을 소리 내서 읽는 동안

뿌리에서 가지까지 흘러가는 물소리

수시로 숲의 소리가 그리움에 젖는다

 

-《여수작가》 2021. 제9호

 


 

김삼환 시인 / 서대문형무소

 

 

안산 둘레길을 걸어서 한 바퀴 돌다가

내려오기 직전 아래를 내려다보면

서대문형무소 자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곳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아내는 내게 항상 같은 질문을 던진다

“적어도 문인이라면

언행이 일치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 한마디는 나를 늘 부끄럽게 한다

굳이 역사 기록을 들추어보지 않더라도

서대문형무소가 어떤 곳인지는

익히 알고 있지만

‘미와 와사부로(三輪和三郞)’

일본인 고등계 형사의 이름을

내가 기억하려고 애쓰는 것은

그 놈 앞에서 치욕을 당해야 했던

독립투사들의 모습이 스쳐가기 때문이고

식민지시대에 살았던 저명한 문인들에 대해

그들이 남긴 빼어난 문학작품과

그들이 행한 친일의 행적은

구분하여 평가하자고 외치는 사람들의

쉰내가 진동하는 목소리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삼환 시인 / 나도 저항할 수 있을까

–이중성(二重性)에 대하여

 

 

염소는 참 맛있게 풀을 뜯어먹는다

매일 한결같이 웃음 띤 얼굴로

품위와 품격을 갖추어 말해야 하는

나도 때로는

잘못된 것에 대해 저항할 수 있을까

염소는 맛있게 풀을 뜯어먹는다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온종일

업무에만 몰두하고 단 일 초라도 해찰하지 않는

나도 때로는

부정한 것에 대해 저항할 수 있을까

염소는 풀을 뜯어먹는다

길바닥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가래침을 뱉지 않으며 타인에게 늘 예의를 갖추는

나도 때로는

무례한 것에 대해 저항할 수 있을까

염소는 풀을 먹는다

염소가 풀을 먹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면

알 수 있으리라.

염소는 참으로 맛있게 풀을 뜯어 먹는다

 

 


 

 

김삼환 시인 / 활주로

 

 

터엉 빈

​활주로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속에

​​품은 칼을

​​버린다

​하얀 선

​제트기 흔적이 바람으로

​뭉개질 때

 

-『한국의 단시조 156편』 2015.

 

 


 

 

김삼환 시인 / 사막어록 2

 

 

이제야 비로소 나는 여기 와서

사람을 사랑할 자격을 얻었다

 

하란 산맥을 넘어 텅거리 사막을 횡단하는 바람이

등을 구부리고 낮게 불어와 흐물흐물한 해를 밀어내는

저녁 무렵에 내 몸에서 빠져나온 벌레들이 모래 속을 헤집어

손금 같은 선을 그으며 가고 있었다

 

선을 따라 내 노트에 적힌 미움의 기록들을

하나하나 모래 속에 묻었다 내 이력 속에 얼룩처럼 묻어 있는

몇 번의 욕설과 몇 번의 무례와 치욕, 몇 번의 눈물 섞인 안타까움도

함께 묻었다 모래 위를 쓰다듬는 키를 낮춘 바람의

부드러운 손을 볼 줄 아는 눈을 얻었다

 

그 자격증 하나 얻기 위해 이 먼 길을 돌아왔느니

벌레들이 빠져나간 텅 빈 몸으로 텅거리 사막을

걷고 또 걸으며 나는 다시 사람을 사랑할 자격을 얻었다

 

 


 

김삼환(金三煥) 시인

1958년 전남 강진 출생. 1992년 《한국시조》 신인상 수상 및 1994년 《현대시학》 추천으로 작품활동 시작. 제15회 한국시조작품상 및 제3회 바움문학상 수상. 시집 『적막을 줍는 새』 『풍경인의 무늬여행』 『비등점』 『뿌리는 아직도 흙에 닿지 못하여』 『왜가리 필법』 『묵언의 힘』 『따뜻한 손』 등, 현재 〈역류〉 동인으로 활동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