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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안 시인 / 정박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15.

이안 시인 / 정박

새벽에 깨어 보니

밤늦게 밀려온 신발들이

현관에 정박해 있다

만선의 기쁨을 부린 신마다

비린내 자욱하다

저마다의 바다에서 벌인

힘겨운 조업으로

바닥 지문이 해지고

뒤꿈치가 가라앉아 있다

망망대해를 이겨내기엔

아득한 한 점의 쪽배

하루를 추스를 새도 없이

더 높은 파도와 막닥뜨릴

출항의 아침이 오나보다

닫혔던 항구마다 수런수런

뱃길이 열리고 있다

-다 하지 못한 지난 가을 이야기 _<이안> 시인 시화전

 

 


 

 

이안 시인 / 구석이 되고 싶은 믿는 도끼

 

 

나를 믿는다면

말리진 않을게

하지만 그전에 알아 둘 게 있어

 

네가 한 손으로 들기엔

난 너무 무거워

한쪽은 뭉뚝하고

다른 쪽은 잔뜩 날이 서 있지

 

딴생각을 하다간

쿵!

발등을 다칠지도 몰라

 

그런데도 네가 나를 믿는다면

난 할 수 없이

구석이 될 수밖에

 

네가 외로울 때

찾아와 서성거리다가 가기 좋은

 

네가 믿는

구석이 될 수밖에

 


 

이안 시인 / 금

 

금 간 시멘트 사이에서

노란

민들레가 피어났다

민들레처럼 노란

시는 마음이 금 간 곳에서

피어났다

금 간 곳에 달아 주는

노란

단추

 


 

 

이안 시인 / 은

 

나는 은이 좋아

은하수

은빛

은근

은은하다

고양이처럼,

은솔이

뒷자리가

가만가만

나는

좋아

 

 


 

 

이안 시인 / 도라지꽃의 올해도 하는 절망​

 

올해는 정말 다른 모양으로 피고 싶었어

올해는 정말 다른 색깔로 피고 싶었어

올해는 정말 저만치 혼자서 피고 싶었어

올해는 정말 다른 꽃이 되고 싶었어

 

 


 

 

<동시>

이안 시인 / 사월 꽃말

 

 

엄마, 꽃집에서 적어 왔어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이건 미선나무,

 

고난의 깊이를 간직하다

이건 꽃기린.

 

둘을 붙이면 모든 슬픔이 사라진 다음에도

고난의 깊이를 간직하다

 

엄마, 우리 이 말 기르자

 

 


 

 

<동시>

이안 시인 / 금붕어 길들이기

 

처음엔 풀 사이로 숨기 바빴지

한 번 주고 두 번 주고

며칠 지나니

이제는 살랑살랑 마중을 오네

밥 몇 번 주었을 뿐인데

금붕어와 나 사이에

길이 든 거야

길든다는 말

길들인다는 말

금붕어와 나 사이에

길이 든다는 거였어

둘 사이에

살랑사랑랑

길을 들인다는 거였어

 

 


 

이안 시인

1967년 충북 제천시 출생.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1998년 <녹색평론>에 「성난 발자국」 외 두 편을 발표. 1999년 실천문학 「우주적 비관주의자의 몽상」외 네 편이 신인상에 당선 등단. 격월간 동시 전문지 '동시마중' 편집위원. 1999. 실천문학 신인상. 시집 『목마른 우물의 날들』 『치워라, 꽃!』, 동시집 『고양이와 통한 날』 『고양이의 탄생』 『글자 동물원』, 평론집 『다 같이 돌자 동시 한 바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