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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소영 시인 / 천변길에서
앞서 가는 그림자 목이 실낱 같다
꺾일 듯이 흔들흔들, 문득 이는 유혹 하나
가볍게 툭 꺾어, 저 생을 끝낼 수는 없을까
이승은 늘 그림자거늘 또 욕망을 마음에 담는다
송소영 시인 / 방장 부처를 찾습니다
밤새 빗속이다 숨이 턱턱 막혀 견딜 수가 없다
천지분간 못 하고 그만 보도블록 위로 기어 나왔다
힘겹게 긴 숨을 토해내고 기지개를 편 것도 잠시 어느새 따갑게 비추는 햇살에 시시각각 수분이 빠지며 소리 없이 몸이 마른다 가여웠던지 누군가 마른 가지 주워, 애써 날 들어 올려 풀숲으로 던진다
방향감각을 상실한 나는 다시 기어 나온다 햇살이 내리쬔다 어리석은 육체는 바늘로 찔러대는 머리통을 결국 불섶에 디밀었다
아! 장군죽비 번쩍 들어 어리석은 지렁이 탁 후려쳐 줄 방장 부처는 어디에 없는가.
송소영 시인 / 이제는
개천가를 걷는다 비둘기 서너 마리가 보도블록 산책로에서 과자 부스러기를 쪼아 먹고 있다 사람들이 발자국 소리를 내며 옆을 지나쳐 가도 전혀 개의치 않고 묵묵히 제 할 일만 한다 요즘 TV 드라마에선 남녀 주인공이 충동구매로 구입한 사랑들을 몸에 맞지 않는다고 줄이려고 또 불리려고 언성을 높이고 다투며 야단법석을 떠는데 두터운 시간 속에서 석화된 내 사랑은 그들과 달리 언성을 높이지 않는다 타성에 젖어 각자는 그저 돌아서서 묵묵히 제 할 일을 할 뿐이다 천변의 비둘기처럼 줄이고 불리는 걸 감당하기엔 이제 너무 여윈 시간일까
송소영 시인 / 에티오피아의 바람
커피전문점 바리스타가 건네준 커피콩 한줌이 우리 집에 와 세 개가 발아했다
그중, 한그루는 거실 오른쪽 구석에서 푸르른 잎을 무성히 달고 보란듯이 서있다 귀를기울이면 목동 '칼디'*가 들던 에티오피아 고원의 바람소리
6.25 참전했던 에티오피아 병사들 체리커피 향내 진한 고향으로 달려가지 않았을까 7년의 가뭄으로 아내의 젖가슴에선 궁핍이 발화했지만 그래도 격정의 시큼한 바람은 불었었다
찻잔을 받쳐든 발효된 내 기억속으로 아직 설볶아진 육십여 년을 핸드드립 한다 시간이 스쳐가는 사악한 검은향내 속으로 오늘도 메마른 에티오피아의 바람이 분다
*칼디: 커피 열매의 효능을 이슬람교도들에게 알린 전설의 에티오피아 목동소년
송소영 시인 / 표류도
정처 없이 떠돌던 섬 하나 내게로 와서 모래톱이 되었다
하루 종일 파도가 몰려왔다 몰려가며 더욱 더 단단해지곤 하는데 단단한 모래땅 밑으로 가끔씩 지열이 끓는 줄도 모르고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듯 숨구멍조차 막혀갔다 드디어 멱차오른 마그마는 의식도 못한 채 분출되어 한순간에 모래톱을 뻥 뚫어버렸다
다시 표류하는 섬 하나 내 가슴에 가시처럼 걸렸다
송소영 시인 / 그저 묵언이다
그저 걷는다 닿을 수 없는 이데아 곁을 한 번씩 맴돌며 때로는 첼로가락을 붙잡고 단조의 아카펠라도 붙잡고 자욱하게 골안개 낀 들판을 붙잡기도 한다
그저 또 걷는다 행여 한 번 만날까 풀어진 신발끈을 꽉 조여 매며 트로트를 흥얼대고 통속한 가슴속에 슬픔을 낙하하고 짙은 가지색 제비꽃에 뻗정다리가 된 목도 돌리며 되돌아온다
이제 찻잔을 앞에 놓고 그저 묵언이다 시들병이 도지고 숨쉬는 소리도 버거운 오늘 하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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