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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배 시인 / 수상가옥(水上家屋)
유목민의 핏줄 깊이 한 사내가 내려놓은 집은 오래 머물 양으로 지어진 것 아님
부레옥잠 가시연꽃이 그러하거늘 바람에 조금씩 떠밀리며 어린 물고기들에게 그늘 만들어 주는 것
타는 햇볕으로 몸이 달궈진들 막히는 숨통 끝, 작고 여린 꽃 피워 벌레 같은, 시 몇 편 남기는 일은 본시 없는 집에 연연할 까닭 없는 슬픔도 둥둥 띄우는 것
이유가 더 이상 없는 삶에도 한 사내, 물 위의 집에 머물러 있음은 청개구리 울음 끝 번지는 비와 바람이 일으킨 물결 위에 뿌리를 떼어주기 위한 것
미련 없이 그리곤 넌지시 바라보기 위한 것
박윤배 시인 / 양산 여자
손전화기 속에 사는 여자가 있다. 버튼 하나만 누르기만 하면 쏜살같이 커피 배달해 오는 여자. 좀 식었군! 바쁜가 보지? 물을라치면 입으로 뎁혀 드릴까요? 농담하는 여자
깔깔깔 웃음이 예쁘기도 하지만 사실은 엉덩이가 예쁜 여자. 통도사가 가까워 죄의 그늘 제법 많이 지운 여자. 어릴 때 미친 여자를 본 뒤 옆머리에 들꽃 하나 기억 속에 꽂고 사는 여자. 내가 쓴 몇 편 시 읽고 울었다는 여자
한번 인연은 놓지 않을 것 같은 여자. 운전이 무서워 안 배운 여자. 끝까지 양산다방을 지키고 싶다는 여자. 한 며칠 그녀 잠적에 따라붙고 싶은 여자. 나랑 같이 살림 차리면 키우던 애완견도 자생 춘란도 굶겨죽일 것 같은 여자. 그러나 혼자 느낀 거지만 허술한 내 아랫도리 정력 들키고 싶지 않은 여자
슬림형인 여자. 내 몸 위에서 미끄럼 타서 위아래가 분주할 것 같은 여자. 그 여자는 어제의 여자. 오늘은 내 손끝을 사랑해서 까딱해도 알아서 스마트하게 변신하는 여자. 뒤로 가는 운전은 못하지만 앞으로 가긴 잘해서 요즘은 물 좋은 남자 만나기에 바쁜 여자. 쨍쨍한 햇살에도 더 이상 그을릴 흰 살이 없어 양산을 버린 여자
-『알약』 (시와표현사, 2015)
박윤배 시인 / 연애·1
뱅글뱅글 도네 졸참나무 살갗 터져 진물 흐르던 시큼한 자리에 모가지 한쪽으로 비틀린 나는 등가죽 벗겨지도록 태엽 감긴 팽이처럼 도네 달아날 수 도 없네 버둥거리다 역겨운 노란 액체를 마지막 너의 손위에 쏟아 내겠지 쉼 없이 흔드는 날개에도 몸은 떠오르지 않네 너의 냄새로부터 시작된 연민 펼쳐진 나무의 손금 위에서 평생 할 날갯짓을 한꺼번에 다 할 듯 뱅글뱅글 풍뎅이가 되네
박윤배 시인 / 연애·2
북진강변 발이 뜨거워진 돌은 맨들맨들 모서리 닳도록 어디서 굴러 온 것인지 우리를 맨발로 건너뛰게 했지 내 손에 쥐어진 제법 납작한 돌은 물수제비로 뜨고 싶다했지 둥글게 튀며 작아지는 물무늬 결국에는 가라앉고 말 몸짓이 강의 심장을 두드리겠다니! 고요하리라 믿었던 바닥 이끼에 날아든 낯선 온기의 얼굴이 닿겠지 머지않아 피라미 떼들 갸웃갸웃 시린 주둥이를 문지르겠지 그냥 놔두어도 흘러갈 강이 안으로 아프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돌은 금시 알아버리기도 하겠지 내가 물수제비 몇 개 띄운 건지 짐작으로 아는 곁의 여자는 그래서 흐르는 강물에 번갈아 꺾은, 웃음 다른 들꽃을 하염없이 던져주는 거였지
박윤배 시인 / 연애·3
오래도록 잠자리 날아서 아플 어깻죽지 걱정에 마른 나뭇가지인 양 손가락을 세운다
꼼짝없이 선 기다림이 꼬리 달아오른 너를 살며시 받아 낸다, 나는 재빨리 엄지를 접어 너의 다리 사이를 움켜쥔다
그건 꼬리를 자르기 전의 동작 이빨로 물어뜯듯이 그 아랫도리 통증에 잽싸게 끼워주는 들꽃
花無十日紅 花無十日紅
아둔한 몸짓 날아가는 창공에서 소실점을 끌고 훨훨 떠나는 너
나는 너를 놓아 보내는데 너는 오히려 나를 지웠다고 우겨대는 입술 새파랗다
박윤배 시인 / 중생
두 개의 모서리를 감추다가 생겨난 모서리 하나, 그게 뿔이다
자신을 찌를 순 없어 공중은 더 슬퍼졌다
두려움이 곤두세운 맹수의 털들도 뿔
살아있는 동안 순해지기 위해 온몸 독기를 한곳에 모은
송곳니, 그게 나다
박윤배 시인 / 보석가게를 오픈하다
얼마 전 내가 운영하던 詩창작원에서 기초반을 수료한 보석공예가 김경수씨 그가 꽃신 구부려 만든 반지를 보고 나 보석가게 차리고 싶어졌다
허술한 출입문에 워낭 달고 보안장치도 필요 없이 보석가게 하나 차리기로 했다
첫째 진열장엔 어느 시인이 보았다는 노루의 초경 베인 돌 둘째 진열장엔 연경지에서 만난 붉은 찔레꽃 셋째 진열장엔 박꽃피던 지붕위로 던진 유치 몇 개 넷째 진열장엔 서투른 내 작두질에 베인 어머니 손톱
회칠한 벽면에는 낙타를 타고 먼 길을 걸어올 외로움에 지친 자를 위해 사막주점 삐딱하게 걸려있던 멈춘 시계 내 마음의 보석인 듯 걸어두리
평생을 노동하며 살았어도 먹고 입고 가르치다 보니 모은 돈 별로 없고, 잠시 허욕에 탕진한 신불자라면 더더욱 반갑게 손님으로 맞이하는 그런 보석가게 주인이 되는 거지
진열한 보석을 보는 그들 눈빛에 나의 보석들은 더더욱 반짝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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