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생수 시인 / 어머니1 -고명종 따뜻한 봄날이었지요 어머니 따라 문상 간 두메산골 할머니 댁 논둑길에 뱀딸기 불긋불긋 지천 피어 있었지요 돌아가신 할머니 볕 좋은 봄날 오후 꾀꼬리 노래하는 냇가에 나가 머리 말쑥하게 감으셨단다 흰 코고무신도 반짝반짝 닦아 댓돌 위에 세워 놓으시고 한복 저고리 올곱게 차려입으시고 단장하셨단다 할머니 뽀송뽀송 빨 요 안방에 정갈하게 깔아 누우셨단다 그리고는 눈 감으시고 잠에 드셨단다 고요히 고요히 영원한 잠에 드셨단다 들에 꾀꼬리 종다리 봄새들은 연신 세월을 지저귀고 얼마나 고우셨으면, 곱게 살으셨으면 낮잠 한숨에 영원에 들으셨겠니 아름다운 새가 되어 저쪽 나라로 가셨겠니 불알 흔들며 냇가에 뛰놀던 시절 쫄랑쫄랑 어머니 따라 문산 갔던 시골 할머니 댁 귓가에 나지막이 들려주던 어머니 말씀 흰머리 잔주름의 귓가에 지금도 은은합니다
-시집 <부모님 전 상서> 에서
김생수 시인 / 가을, 최후의 꽃
꽃이 피어나는 것과 잎이 피어나는 것은 다르다 꽃은 처음에 꽃이지만 잎은 마지막에 꽃이 된다 꽃은 피어나면서 시들어 가지만 잎은 시들어 가면서 꽃이 된다 나뭇잎들 울긋불긋 물들어 꽃이 되는 걸 보면 안다
저, 단풍 내 안의 불타는 빛 드러내지 않고 오직 푸르름으로 꽃들 받쳐주다 그 꽃들 영화 다 한 뒤에야 비로소 꽃이 된다 마지막 날에야 약속의 빛들을 바람이 끄집어내 그 영광을 보여준다
울긋불긋 피어나는 나뭇잎들 생애의 끝날에야 꽃이 된다
김생수 시인 / 자연시간
마침 장바닥에서였다 회색 토끼 한 마리가 흰색 토끼 여러 마리와 홀레를 하였다 햇살이 나뭇잎들을 점점이 애무하듯 마주 순식간에 일어난 노련하고 날랜 솜씨였다 언덕 아래 교현천이 졸졸 웃었다 장작불 활활 미는 깡통난로에 빙 둘러선 아낙네들이 종이커피를 들고 까르르 자지러졌다 텔레비전 대한뉘우스에서는 떠나는 초라한 뒷모습에 소금을 뿌린다고 대통령이 푸념을 하였다 겨울 나뭇가지 마지막 잎새 하나가 툭! 발치에 떨어졌다 포장주막에 들어 선지국밥에 청와대 만찬주 소백산 생막걸리 1병을 시켰다 목숨에 불 켜 들고 한 잔 홀짝이다 갑자기, 짐수레를 끌며 채찍을 맞고 있는 병든 말 의 다리를 부여잡고 울부짖는 니체가 떠올랐는데 어디 무슨 일 있냐는 듯 먼 데 하늘에 구름 한 점이 시나브로 흩어졌다 좌판에 가지런한 고등어들의 푸른 등 위로 겨울바람 한 줄기가 사람들 속으로 불어갔다
김생수 시인 / 우주의 숨소리
'그럼 안 먹어 공짜로 술 사준다는데' 새벽 같이 고요한 대머리 영감이 대포 한사발을 쭈욱 들이켰다 아득한 어디선가 눈이 내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에뮤 그래도 너무 먹어 엥간이 먹어야지' 주모가 김 자욱한 술국을 뜨며 중얼거렸다 먼 데 어디에선 또 봄비가 내리고 있으리라 새들이 재재발거리며 날고 아무도 보지 않는 데서 강물은 출렁출렁 흘러가리라 어둠이 나비만큼 앉아 있는 창가에 중늙은이들 막걸리 잡담이 새벽을 깨우면 계곡 물소리에 앉은 선승은 경을 치며 신새벽을 맞을 것이다
벌레가 기는 것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 여울물이 소리 내는 것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 중늙은이들 막걸리 잡담, 선승의 경 한줄 그런 숨소리들이 나를 깨운다
마침 햇살이 창문에 처먹 달라 붙는다 이제 대지가 펄펄 끓고 한 점 쉼표로 떠있는 우주에 사람의 소리 쟁쟁할 것이다 잎이 돋고 꽃들이 만발하리라 모르는 사이에 모르는 사이에
김생수 시인 / 혼애(魂愛) -눈물
나는 눈물을 사랑한다 세상에 살아있는 모든 눈물 가진 것들을 사랑한다 가슴에 아름다움이 더는 아름다울 수 없어 맺히게 되는 것이 눈물이다 눈물은 보이는 것이 아니다 감추다 그만 들켜지는 것이다 항아리 뒤에 숨은 눈물 뒷산 깊숙이 바위 뒤에 숨은 눈물 이불 속 깊이깊이 숨은 눈물 남몰래 숨은 눈물이라야 순수에 이른다
눈물은 다만 눈물을 바탕으로 꽃필 뿐 그 무엇도 목적하지 않는다 어느 것 하나 요구하지 않는다 눈물은 땅의 빛 하늘의 빛으로 조화로워 이미 완벽한 하나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눈물은 가슴에서 가슴으로만 흐른다 가슴에서 솟지 않은 눈물은 눈물이 아니다 가슴으로 흐르지 않는 눈물은 눈물이 아니다 목숨 가운데 가장 영롱히 빛나는 것 그것이 눈물이다 나는 눈물을 사랑한다 눈물 가진 모든 목숨들의 생채기를 사랑한다
내 지친 어깨 위에 파랑새로 앉은 당신은 나의 눈물이다
김생수 시인 / 길 위에서 지워지다
아무도 그를 보았다는 이는 없다 하얀 길 위에 먼 길을 떠났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 누구도 그의 소식을 들었다는 이는 없다 아득히.......멀어지는 것들 아득히.......사라지는 것들 하늘에서 송이송이 처음의 것들이 내린다 허구헌 날들이 깜짝 놀라 불을 켜는 저녁 세상의 헛것들이 하늘하늘 하늘에서 온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손세실리아 시인 / 첫사랑 외 5편 (0) | 2025.08.15 |
|---|---|
| 박윤배 시인 / 수상가옥(水上家屋) 외 6편 (0) | 2025.08.15 |
| 송소영 시인 / 천변길에서 외 5편 (0) | 2025.08.15 |
| 권선애 시인 / 절대 과자 외 5편 (0) | 2025.08.15 |
| 이안 시인 / 정박 외 6편 (0) | 2025.08.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