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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남 시인 / 적포도주
바람이 날개를 접는다 활자들이 벽을 타고 흘러내린다
물어보지 않았는데 속살을 여는 빈방은 꽃 빈병은 말의 퍼즐이다
언제까지 머물러야 퍼즐이 되나? 꽃이 되나? 어제의 숨소리가 발목을 잡아챈다
탁자 위에 내려앉은 입술 하나 나는 너의 계절이 궁금하지 않다
색이 색을 치우고 소리가 소리를 지운다 없는 것들로 흘러넘치는
여기
저 소리의 색은 붉다
최호남 시인 / 벽은 털어낼수록 밖은 어둡다
눈동자의 색깔이 바뀐다 햇살이 녹으며 방은 물로 차오른다 대지를 적시는 사각이 가로를 끌고 간다
걸을수록 운동화는 바람 끝으로 아스팔트가 걸음을 중단시키는 오후
새 잎이 돋아 봄이 시작되고 밖은 방으로 모여들어
물을 먹는다 자작나무 수액은 투명한 유리관을 기억한다 세로가 그림자를 만들고 밤마다 울었지
벽을 부수면 눈빛이 변할 줄 알았어 분노를 풍경으로 그릴 수는 없는 자작나무의 시간들은 숲을 털어내려고
밖은 어둡다
최호남 시인 / 경계
골목이 그림자 속으로 들어선다 그림자에 모퉁이가 돋아난다 바람이 바람을 벗는다 나는 듣는다 바람의 모퉁이를
보이지 않는 귀가 비대해진 경계에 더 비대한 경계를 쌓아 올린다 경계 너머 누군가 목소리를 삼키고 삼킨 목소리가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어둠을 만드는
바람과 골목 사이 내일의 발치에서
최호남 시인 / 투명 밖으로
투명이 자꾸 나를 앞지른다 속이 있을 수 없도록 누가 나를 이렇게 환하게 들여다보고 있을까 비는 점점 더 많이 내린다 그칠 줄 모른다 투명은 어제거나 아주 먼 이야기 그것은 늘 확실하고 투명하다 비가 온다 비는 잘 걷지 못한다 온몸에 비에 젖어 걷는다 생각이 닿지 않는 곳에서 누가 비를 이렇게 칠하고 있을까 투명이 나를 적신다 투명을 잡으려 하면 투명은 어딘가 가고 없다 그럴 때마다 투명 위로 나를 겹쳐야 한다 하늘에서 오는 비 투명을 하나씩 포개며 내려오는 비 너는 오래전에 떠났는데 떠나기 위해 왔구나 네가 유리창 밖에 섰을 때도 그랬다 그 유리창을 어디선가 보았는데 기억나지 않았지 과거는 확실하고 투명한 마음, 그 유리창을 언제 통과 할 건지 물어보고 싶었지
이 투명 속에서 나를 언제 꺼낼 것지
최호남 시인 / 흔적
모두 어디로 가는 걸까
산을 넘다 멈춘 곳 물 위에 남아있다 뒤집혀진 표지판이
보이지 않는 대문 어디가 입구인지 모른다 녹슨 우체통 주소는 맞는데 누군가를 오래 기다리고
빈집을 덮은 낙엽 돌계단을 차지한 넝쿨 서로 다른 삶의 방향으로 엉켜있다
늙어가는 팽나무 저수지를 깊숙이 덮는 빗소리 버려진 운동화 속으로 물이 고인다
물소리를 따라가 본다 가을 햇살처럼 납작해진 표지판 빈손으로 올려본다
지워진 주소를 들고 어디로 가는 걸까 마을을 열어주는 사람 없는 이 마을은
최호남 시인 / 감꽃
꽃잎이 밤으로 간다 떨어지는 나에게 빛깔이 있을까 봄이 밤을 걸어 낯선 곳에 이를 때 떨어진 나를 주워 담는다
누구의 목소리일까 모래에 갇혀 돌이킬 수 없는 개미를 따라간다
거대한 감나무를 보았지 단단한 꽃잎은 아플지 몰랐지 황금빛으로 피어 햇살이 되던 발소리는 흙의 시간에 짙게 누워있다
가고 아무도 오지 않았다 떠나가지도 기다리지도 않는 묻어가고 있다 돌아오지 않는 꽃잎은 바람아래에 길게 쌓이고 시간도 잊었다
나뭇가지는 움직일 수 없는 몸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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