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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기화 시인 / 문상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17.

김기화 시인 / 문상

 

 

친구 아버지의 부음은 호상이었다

오래 정박한 병치레 탓일까

속을 태우는 향불이 부질없다 부질없다

영안실 가득 향을 꿇어 앉힌다

사돈의 팔촌까지 불러들인 사자는

꾸역꾸역 넓혀가는 영안실 한구석에 끼어

저승길 노잣돈을 핑계로 화투를 엿본다

운수를 떼어보던 그 아버지의 그림들

상주들은 곡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삼베옷 속에서 빠져나온 사자는

한량이라 천대하던 이승을 의기양양 휘젓는다

노름판에서 날린 전답에 미련이 남았는지

손등엔 사혈(死血)의 검버섯이 웃고 있다

경로당에서 함께 고리를 뜯던 노인들은

육개장 한 그릇을 후딱 해치우고 사라졌다

무성영화의 한 장면인 양 휘휘 몰아치는

한 아비의 영정사진 앞에서

상주는 문상객과 얼큰쌉쌀한 말을 섞는다

상조회 주방 도우미들만 종종걸음 치는 장례식장

아버지를 바로 세우던 막내아들과 눈이 마주친 순간

부질없이 허공을 비껴가는 손짓

비로소 저승의 문턱에 다다른 것이다

 

-시집 『아메바의 춤』 2017. 詩와에세이

 

 


 

 

김기화 시인 / 재봉틀 단상

 

 

엄마는 노루발이었네

시커먼 무쇠 다리로

네모진 목관을 이고 살았네

일할 때만 뚜껑을 열고 나왔네

 

자근자근 사슬코를 만드는

돌림바퀴 음계에 따라

매운 시절 촘촘히 빠져 나갔네

별별이 기워낸 누비 이불

그 속에 들어앉은 오롯한 식구들

당신은 시리디 시린 관절을 앓고 앓았네

 

윗실 아랫실 땀수로 조절하고

노루발로 걸어온 굽잇길

마디마디 색실 걸어

하얀 별빛으로 마름질했네

 

쿨렁 쿠욱 헛도는 굴림판 위

헐거워진 뼈마디에 물이 고였네

통증으로 오그라든 핏줄어 맞춰

허벅지 사이로 흘러내린 살점들

몸 누인 그곳에서 새우잠을 잤네

 

이음새가 닳아 가릉거릴 때

풀린 실타래 끌어 안으려는 듯

낡은 널 속으로 자꾸 몸을 마는 당신

앙상한 노루발로 잠들어 있네

 

-시집 『아메바의 춤』 2017.

 

 


 

 

김기화 시인 / 사서함 106호

 

 

누군가 내 배꼽에 태엽을 감아줘

겨드랑이 가려워도 날개는 돋지 않아

붉은 녹물 흐르는 철문을 열어줘

그저 비상하고 싶을 뿐이야, 나는

저벅저벅 아득한 군화소리 들려오면

내 몸은 온통 직모로 각이 서지

날 차라리 감전시켜 달라고

더듬이를 세워 열쇠 구멍을 문지르지만

누군가 봉해 버린 입은, 사서함 106호

점점 굳어 가는 내 배꼽을 좀 봐

아무리 비벼도 정전기는 일어나지 않고

이미 식어 추운 동절기 같아

아무나 열 수 없는 블랙박스가 내 이름이야

철커덩 위험수위를 벗어나

내 몸의 내장까지 독식하려는

군사서함이라는 함구령에 불침번을 섰어

절벽으로 떠 있는 샛별 앞에서

더듬떠듬 미명의 동공을 꺼냈어

스프링 달린 내 눈은

어둠 속에서 또다른 어둠을 폭식한 채

눈 먼 별과 동침을 했지

축축한 바람이 가라앉는 시간

사서함 106호, 그 건너 편 아파트에서

내 몸에 꼭 맞는 사서함을 짠 듯

직사각형 관 하나가 곤돌라를 타고 내려왔어

 

 


 

 

김기화 시인 / 조망권을 드립니다

 

 

 창공을 날던 새 한 마리 조망권을 사려는 듯 기웃거려요 분양 안내판 위에 올라앉아 콕콕 조감도를 찍어요 두리번두리번 뾰족한 부리가 없는 그녀는 조각 된 낯선 그림 앞에서 밋밋한 평면이에요 그 평면을 딛고 수직으로 오른 고층 소용돌이가 프리미엄을 달고 하늘을 날아요 고급 소재로 시공된 모델하우스를 둘러보던 그녀는 도시귀족이 되어 계약서를 작성할까요? 꼼꼼 실내 건축가의 화려한 이력이 눈조리개를 펼치네요 최첨단 서랍식 환풍기아래 오글보글 모형 찌개가 끓어요 대리석 식탁 위의 열대과일이 탐스러워 아삭아삭 군침을 돋우네요 아트홀 품격으로 인테리어한 가구는 옵션이에요 일조량을 들여와 공간을 연출한 그가 넌출넌출 액자 속을 걸어 나와 말을 트네요 조망조망 하얀 혀를 놀리며 조명 아래서 세련된 디자인을 해요 베란다 확장공사는 시공사의 미끼 라나요 점점 몰려든 인파들이 통유리 안에서 조망권을 저울질해요 물지느러미를 달고 전망을 흔드는 밀물과 썰물, 바다의 모양이 바뀌고 있는 걸까요? 하늘과 산과 구름과 햇살은 모두 예약된 프리미엄이에요 창창 수평선이 보이는 신 도시개발지역, 파도가 하얗게 음소거된해면도 육지를 향해 자맥질 하네요, 꿈틀

 

 


 

 

김기화 시인 / 옹이

 

 

그녀의 발가락에 옹이가 자랐다

엄지발가락이 흰 자리에

완강하게 터를 잡은 딱딱한 눈

아이를 하나씩 출산할 때마다

그 두께는 단단해졌다

들로 산으로 버석거렸던 자갈길

코고무신이 뭉개놓은 굳은 코였다

저 밑 발바닥에 절은 고린내

무지외반증이라 했다지

처음엔 콩알만 한 물집이었다지

터지고 아물기를 수십 차례

찌꺽찌꺽 신발 속 옹이는 커져만 갔다

머리 위에서 짓눌린 무게는

경추를 타고 척추를 타고

종아리를 지나다 불거진 독이었다

발등에서 뭉친 어혈인 것이다

그녀의 제일 낮은 곳에서

통증으로 자라고 있는 옹이

짚은 지팡이의 무게가 기우뚱

불현듯 꼬물꼬물 내 발등이 가렵다

 

-《시와소금》 2021. 여름호

 

 


 

 

김기화 시인 / 우편함엔 편지가 없다

 

 

'알이 부화하고 있어요,

우편물이나 이물질을 넣지 마세요! 주인백'

 

언제부턴가 편지가 부재하는 그들의 방

새집 모양의 빨간 우편함엔

새 식구들이 허락도 없이 세를 들었다

뾰족한 주둥이들을 쪽쪽대며

어미를 기다리고 있는 저들의 둥지

 

쥔장 행세를 하려고 들여다보다가

세 든 사람이 되어 숨죽이는 발길

 

 


 

김기화 시인

충북 청주 출생. 2010년 《시에》 봄호를 통해 등단. 시집 『아메바의 춤』. <시에> 문학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