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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춘희 시인 / 튜브
처음보다 엉망이어서 좋았다 벌름거리는 콧구멍 기타노 다케시처럼 움직였다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이 있었다 여기는 거리가 없어 슬픔도 반짝인다
바다 앞에서 바다가 있다고 외치는 사람들 이보다 큰 행운은 없을 거야 모래를 쓸어내리며
사실은 사실을 무릅쓴다 모래 깊숙이 알을 까는 무엇처럼, 그런 해양생물, 까놓은 알처럼 작게 웃을 것 같은 존재의 이름, 지금 나는 모른다, 백과사전을 꺼낼 수 없다 모두 젖어 버릴 테니까
벌써 세 번째 일기를 쓴다 오늘오늘오늘 마지막엔 정말이지 원하는 결말을 슬쩍 끼워 넣고 파도를 기다린다
무관한 서로로 이루어진 사전 닿지 않는 수심을 떠도는 다리처럼
깊은 이완이 필요해 나를 훑고 가는 맥락 어디에나 있는 박자와 리듬을 믿으면 어디서나 당할 수 있는 박자와 리듬이 된다고 나는 생각
해 봤던 것을 다시 해 본다 구성은 반복을 구조화한 것 타인에게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
짜지 않고 투명한 물 한 잔을 마시면 바다는 기절한다 저 자신에 대해 충격을 받는다 인간은 쓴다
둥근 가장자리의 텅 빈 심연을
-시집 <우리는 우리가 필요해>에서
서춘희 시인 / 디스토피아 디스토피아
잊지 말아야 할 일을 반드시 잊게 되고 추모공원 나무 계단에서 흙이 묻은 신발을 털었다 춤이라 할 수 없는 춤을 추고 네 뺨을 만졌는데 빛처럼 팔자걸음으로 빗금을 밟거나 빗금을 우습게 여기며 벽과 나무와 기둥을 툭툭 치며 지나갔는데 오늘은 이름 없는 녹슨 표정의 피어싱 싸라기가 나리고 우리는 복분자주를 마시고 마시고 붉다가 붉은 물이 되어 버린 열매처럼 교묘하게 서로 익사시키는 밝은 밤, 밝은 밤이 좋다 단련 단련 늘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한테 하려던 복수였던 것 같다 익어 가는 달이 구름 속으로 들어간다 차분하게 실패하고 싶어 거짓을 말하는 기분으로 고봉산으로 습지공원으로 사이사이 벌어진 숲으로 천성 천형 천치가 나란히 웃자란 봉분까지 벌거벗고 가 볼까 이른 아침이 오면 우리는 우리(cage)가 필요해 콧구멍이 데일 정도로 뜨거운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끔찍하게 아름다운 네가 어딘가에 있다고 믿는다
-시집 <우리는 우리가 필요해>에서
서춘희 시인 / 생강
네면 이상의 내면 집어먹은 마음은 갈수록 잘 들리지 않는다 울퉁불퉁한 옆구리를 긁으며 아침마다 명상을 해 본다 클래식 FM을 듣다가 oui, oui 천장을 주목한다 긍정하는 입과 시선이 따로 논다 제1의 법칙. 생강은 분리주의자다 펴지지 않는 주먹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믿는다 파도의 주름을 몰아붙이거나 게르 같은 밤 구름 아래서 심하면 착한 아이처럼 기도도 하지 결벽과 결박에 능통한 어린 신과 완성된 그림의 오 초 전에 대해서도 제2의 법칙. 생강은 나타난다 말을 늦추면서 맨 마지막 단어를 만지작만지작 왼손잡이의 말더듬이 봉지 속에 있다 절대적으로 생각하기에 달렸다 눈을 감고도 한눈을 판다 유일한 네가 유일하게 변했다 그럴듯한 핀잔을 듣는다 제3의 법칙. 생강은 굳지 않는다 다만 부패한다 주어진 현명함을 바라는 바의 꿀처럼 사용한다 겨울과 밤의 의지는 교묘하게 뒤섞여 노랗고 고약한 향이 난다
서춘희 시인 / 당신은 나를 나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나를 나무라고 생각한다. 큰 귀에 쌓인 먼지를 당신의 어제와 동일시한다. 불어넣을 말이 많구나 까슬한 껍질이 떨어지면 우산을 접고 담요를 덮는다. ‘나무의 슬픔’ 이라는 책을 들고 찾아와 실은 아무것도 아닌 슬픔을 올려 둔다. 그러니까 언젠가부터 당신은 나를 키운다. 비밀을 옮겨 적으며 줄을 친다. 노란 무와 병아리와 오리를 본 적 있니 막 떨어지는 봉오리는 어떠니 노을에선 얼음 갈리는 소리가 난다. 이럴 땐 살갗이 일어 넌 상상이 얼마나 해로운 줄 알지 당신은 악수 대신 나를 포옹한다. 문을 열거나 닫지 않고 매달리는 풍경이 된다. 그건 슬픔을 간직하는 방식이다. 일치하지 않아 가능한 각도를 생각한다. 들어가 본 적 없는 방의 질감을 생각한다. 지루하게 뻗어 가는 구름을 물에 개어 준다. 영원하지 않은 꿈을 꾸렴 시계탑 아래서 우연히 만난 사람처럼 발등에 그림자를 떨어뜨린다 나를 길 — 게 부른다.
—시집 <우리는 우리가 필요해> 中
서춘희 시인 / 흰색 회화
애써 기억할 필요 없는 기억 같은 거 아닐까
그을음이 묻은 장화를 아직 신은 나는 사그라지는 대화를 그대로 둔다
눈이 오면 찾아가곤 했다
덮인 눈송이 하나가 마냥 부풀어올라 사방을 열어 두었다 함박
이마를 가린 빛과 들리지 않는 대답 욕조에 누운 것처럼 알맞은 기분이 들어 오물거리는 입을 보면 살갗에 눈송이가 닿고 마주 보는 고립 속에서 자라는 고독이나 심각한 대치 흰 배경을 두면 그런 일을 견딜 수 있다 지붕과 나란한 어깨에서 초승달이 솟는다 먼저 걸어 놓은 달에서 얻지 못한 감정을 나는 느꼈고 물이 흐른 자국이나 비벼 버린 재가 달의 무엇으로 작용했는지 생각한다 깊숙한 주머니를 털듯 여름 찻잔 속 눈보라가 일고 흰 면에 흰 줄을 칠 때 각자의 얼굴 위로 떨어지는 농담의 형상 이럴 땐 꼭 날이 흐리더라 아름답지만 어떤 건 끔찍하고 먼저 울지 마 마르지 않은 그림으로 돌아가려고 당신은 분무기를 들어 칙칙 물을 뿌린다
-시집 『우리는 우리가 필요해』에서
서춘희 시인 / 못 2
바깥의 폭설에 기대 깊을수록 한입 한입 가위바위보를 하면 자꾸 녹이 스는 개에 대한 우정이나 길고양이에 대한 연민과는 먼 방식으로 보이지 않는 이웃에 감사했다 사소하고 투명한 십이월의 텀블링, 머리와 발끝을 헷갈려 짚으며 별 다섯 개를 받았다 언 운동장으로 이제 막 태어난 바람이 불어왔다 악어는 입을 까마귀는 정수리를 늙은 개는 상한 뿌리를 문턱에 대고 문질렀다 방에는 일어서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 층 세탁소 옆 영어 교습소에서 혼자만의 발음을 따라했다 테두리 없는 표정이 전속력으로 나타났다 손가락 사이를 벌리는 못의 끝을 보면 짓게 되는 표정 밤도 별자리도 꽉 차버렸을 때 거울 속 사그라지는 어둠을 바닥까지 핥았다
-시집 『우리는 우리가 필요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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