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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준모 시인 / 반의어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17.

강준모 시인 / 반의어

 

 

오십 중반의 사내가 런닝머신 위를 달린다

사내는 달려도 계절은 늘 그 자리

거울 속 사내도 제자리이다

사내는 거울 속 사내를 아무래도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한 방향으로만 도는 땅에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린다

사내는 땀을 좋아한다

거울 속 사내는 사내의 외꺼풀 눈을 좋아한다

속도를 늦춰도 거울 속 사내는 다가오지 못한다

사내는 바람처럼 내일이었던 오늘을 달린다

거울 속 사내는 사내의 반의어

사내가 불을 끄고 빛으로 나가면

거울 속 사내는 그때서야

거대한 아가리를 가진 동굴로 걸어 들어간다

 

-불교문예 2017년 겨울호

 

 


 

 

강준모 시인 / 몸에 새 잎이 돋고 있다

 

 

장롱에서 오래된 양복을 고른다

 

한동안 몸과 함께 걸었다

일산서 회기동까지 눈비 맞으며 출퇴근하던

통 웃도리와 주름바지

좀 먹은 시간서 나프탈린 냄새가 난다

 

때로는 술에 취해 종로3가 환승역을 지나쳐

인천에서 깨어나 퀭한 눈으로 달을 보곤 했지

택시를 잡지 못해 광장을 서성이며

양손을 감싸주던 바지 주머니

고집스럽게 가방을 가로 메어

색이 바랜 어깨선이 축 늘어졌다

 

감청색은 달빛을 좋아했다

밤이 깊도록 술잔을 부딪치며

잃어버린 꿈을 찾아 뒤적거렸던

양복주머니는

낯선 영수증과 명함으로 밤을 대신했지

 

오랫동안 양복은 그때 거기로 남아

터미널의 시계처럼 고독하게 걸려있다

버스를 기다렸던 시간의 얼룩이

흐르는 물빛으로 남아 있다

 

밖에 날씨는 좋습니까?

낡은 어깨가 축 쳐져 있다

 

옷을 버리는 일은

나무처럼 색 바랜 추억들을 떨구는 것

꽃잎은 갈래갈래 날리고

나무는 부지런히 옷을 입는다

 

그림자로 늘 어눌했던

미완의 꿈을 큰 쇼핑백에 구겨 넣고

 

새로 산 옷을 장롱에 건다

 

-창작21 가을호

 

 


 

 

강준모 시인 / 마루

 

 

한나절 머금었던 빛을 토한다

빛을 밟고 간 수 만의 발자국을 회상한다

절구에 고인 물에 하루를 못 참고 익사하는 바람들

외할머니 잔소리는 가마솥 안에 감금되고

여름은 밤이 깊도록 벌레를 소집한다

헛기침이 건너오는 동안

마루 밑 백 년 묵은 어둠에서 묻어나는

통증은 삐꺽대다

오랫동안 얼룩이 얼룩으로 닦여질 때

마루는 어둠의 빛으로 바닥을 다진다

과묵한 대들보를 싫증나도록 바라 본 착한 나무

처마 끝 허공에서 별은 내려와

마루에 쌓인다

 

 


 

 

강준모 시인 / 소용돌이에 관하여

 

 

그는 몸의 그림자를 탈탈 탈수하고 있다

 

어김없이 돌아오는 몸의 껍질들

이왕이면 물은 먹먹한 하늘빛 수위

조금씩 느슨해지는 단추들

부드러운 그의 손이 혀처럼 출렁인다

옷이 허우적대며 신음소리를 내고 있다

밤이 깊도록 돌아가는 몸의 현기증

브래지어 끈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원색의 옷을 입어야 좋지

어차피 몇 바퀴 돌고 나면 옷은 헐게 마련

간혹 돌아오지 않는 옷도 있다

탈수 뒤에 쏟아지는 물처럼

다시 젖어가는 옷의 오르가즘

탈색되고 실밥이 터져서야 찾아오는 연민

 

아직까지 그보다 오래된 옷은 없지

그가 해줄 수 있는 건

돌고 도는 일

무릎처럼 부정한 몸의 그림자들

얼마나 돌려야 할까

어둠을 휘휘 저으며

그의 심장이 다시 소용돌이치고 있다

 

 


 

 

강준모 시인 / 주광성

 

 

망우역 승강장 틈새로 햇살이 들고

사람들이 모인다

수억 광년을 지나 대기권을 통과한

해의 마음은 모나지 않아

그림자들은 해를 찾는다

몸의 뒤편을 비로소 바라다 본다

바닥을 납작 엎드린

그림자는 우울한 나의 직분을 감추고

앞차를 놓쳐 한 칸씩 밀린 시간이 아쉬운 듯

목을 길게 뺀다

사람의 일생을 하나의 색으로 요약한 기법

누구에게나 공평한 죽음의 색이다

내면이 무거운 그림자는 땅을 어슬렁거리다

전철이 도착하고

몸들은 다시 그림자를 거둔다

시간의 문은 닫히고

햇살은 플랫폼에 남는다

 

 


 

 

강준모 시인 / 간짜장을 기다리며

 

 

주방 음식 출입구 사이로 둥근 잔등이 보인다

그는 홀로 육중한 침묵을 돌리고 있다

모든 말들은 프라이팬으로 들어간다

슬픔을 볶고 절망을 능숙하게 뒤집는다

미사여구 같은 돼지고기 몇 점을 떨어뜨린다

이내,햇살보다 눈이 시린 양파 껍질을 잔뜩 넣고

외로움보다 진한 춘장을 넣고 식탁으로부터 날아온

한 장의 허기를 볶는다

아내가 가끔 주방에 들지만 프라이팬은 언제나 그의 몫

여름은 양은냄비처럼 불끈 달아오른다

춤추는 불꽃은 과묵의 프라이팬을 희롱한다

혁명의 온도는 순식간에 가슴에 옮겨붙고

한 줌의 소금과 국자의 통제에 따라

주방의 날 것들은 차례로 투신한다

그는 한 그릇의 배고픔을 위해 프라이팬을 돌린다

 

 


 

강준모 시인

1961년 서울 출생. 경희대학교 및 同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7년 《창작 21》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오래된 습관』 등. 경희여자고등학교 국어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