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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배 시인 / 석등(石燈)
새벽 안개 자욱한 속리산 법주사 마당 한가운데 천 년을 서 있는 석등을 보고 당신은 아름답다고 했다 이끼를 입고 안개 속에 서 있는 저 석등이 아름답기는 해도 천 년을 변함 없이 아름답기는 해도 안개 자욱한 석등 앞에 석등처럼 서서 석등을 바라보는 당신은 그 중 아름다웠다
김상배 시인 / 청춘가靑春歌
만화방창 마곡사 개울가 식당에서 막걸리에 취한 아내 첫 손녀를 들쳐 업고 서른도 넘은 딸을 깔깔 웃고 툭툭 치며 바로 그날 목련꽃이 활짝 핀 것으로 치면 너 같은 건 거기에다 댈 것이 아니여, 삼십 년 전 학교 후문 한 남자를 만나서 꿈만 같은 그 봄 날 꽃에 울던 한 여자가 봄바람 흰소리로 불러보는 청춘가
김상배 시인 / 1980 그 때는 그랬지 아참,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환한 낯빛으로 팔오광장 금방울집에 둘러앉아 있곤 했지 둘러앉은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달아오르는 까만 무쇠철판의 두부며 김치를 보던 그 눈동자들 벌건 대낮에도 책 한 권씩 옆에 끼고 앞에 놓인 잔을 높이 들어 기세좋게 부딪치면 시대를 걱정하는 노래들 구부러진 쇠젓가락 장단으로 떼창으로 불러제끼다 입담좋은 주인 아주머니에게 한소리 들어도 마냥 좋던 용호, 창원이, 진희, 유식이 형, 성현이, 종금이 그 때는 우리 그랬었지
-시집 <낮술>에서
김상배 시인 / 낮술. l
이러면 안 되는데
김상배 시인 / 늦장가 가는 친구를 위한 축시
내 친구 관희가 장가를 간단다 58년 개띠에 늦장가를 간단다 내가 안다, 새장가가 절대 아니다 이번 주 토요일에 친구가 장가가서 연가를 내야겠다니 내 얼굴이 다 붉어지는데 교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결제를 하면서 농담하면 안 된다고 김 선생 웃기는 것을 평소 내 모르는 바 아니나 공과 사를 가려가며 학교 생활 하란다 사유에 집안 일이라고 적고 나 미치는 줄 알았다 선생님들은 이번에 가면 청첩장 꼭 받아오라고 국사 선생 이순득이 깔깔 웃으며 놀려댄다 좋아서 함께 사는 거야 누군들 못하랴만 관희야, 너 큰일났다 싫어도 이제 살아야 한다 어저께 너는 부끄러워서 조용조용 하자 했지만 마흔 일곱에 장가를 가는데 어이 세상이 조용하랴 관희야, 너 큰일났다 싫어도 끝까지 살아야 한다 너 이제 장가가는 거 경주는 물론 논산까지 소문났다
김상배 시인 / 눈꽃
첫눈 내린 날 포장 술집에서 밤늦도록 술을 마셨는데 오줌이 마려운 아내를 따라 나섰다가 눈꽃 핀 나무 아래에서 아내의 흰 엉덩이를 보았네 참 아름다웠네 살맛이 있네
김상배 시인 / 미몽迷夢
외국어 공부가 하기 싫어 국문과에 들어갔고 공술을 실컷 마실 수 있다는 소문에 <화요문학회>의 문을 빼꼼 열었으며 얼결에 시집까지 세 권이나 냈으므로 만족한 줄을 알고 이만하면*
이 무대에서 그만 내려와야 할 터인데 떠나야 할 시간을 아직 모르고 네 번 째 시집을 또 준비하고 있으니 언제쯤 이 미몽迷夢으로부터 벗어나 한낮의 꽃 그늘 속을 저 고양이처럼 무심하게 한번 어슬렁거려 볼까나 아, 나는 내게 잘 맞지도 않는 문학이라는 이름의 목피木皮를 두르고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행성行星까지 여기, 너무 멀리 떠나와 버렸구나
-시집 『아무것도 아닌』 2021.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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