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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상배 시인 / 석등(石燈)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17.

김상배 시인 / 석등(石燈)

 

 

새벽 안개 자욱한

속리산 법주사

마당 한가운데

천 년을 서 있는

석등을 보고

당신은 아름답다고 했다

이끼를 입고

안개 속에 서 있는

저 석등이 아름답기는 해도

천 년을 변함 없이

아름답기는 해도

안개 자욱한 석등 앞에

석등처럼 서서

석등을 바라보는 당신은

그 중 아름다웠다

 

 


 

 

김상배 시인 / 청춘가靑春歌

 

 

만화방창 마곡사 개울가 식당에서

막걸리에 취한 아내 첫 손녀를 들쳐 업고

서른도 넘은 딸을 깔깔 웃고 툭툭 치며

바로 그날 목련꽃이 활짝 핀 것으로 치면

너 같은 건 거기에다 댈 것이 아니여,

삼십 년 전 학교 후문  한 남자를 만나서

꿈만 같은 그 봄 날 꽃에 울던 한 여자가

봄바람 흰소리로 불러보는 청춘가

 

 


 

 

김상배 시인 / 1980

그 때는 그랬지

아참,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환한 낯빛으로

팔오광장 금방울집에 둘러앉아

있곤 했지

둘러앉은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달아오르는 까만 무쇠철판의

두부며 김치를 보던

그 눈동자들

벌건 대낮에도

책 한 권씩 옆에 끼고

앞에 놓인 잔을 높이 들어

기세좋게 부딪치면

시대를 걱정하는 노래들

구부러진 쇠젓가락 장단으로

떼창으로 불러제끼다

입담좋은 주인 아주머니에게

한소리 들어도 마냥 좋던

용호, 창원이, 진희, 유식이 형, 성현이, 종금이

그 때는 우리 그랬었지

 

-시집 <낮술>에서

 

 


 

 

김상배 시인 / 낮술. l

 

 

이러면

안 되는데

 

 


 

 

김상배 시인 / 늦장가 가는 친구를 위한 축시

 

 

내 친구 관희가 장가를 간단다

58년 개띠에 늦장가를 간단다

내가 안다, 새장가가 절대 아니다

이번 주 토요일에 친구가 장가가서

연가를 내야겠다니 내 얼굴이 다 붉어지는데

교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결제를 하면서 농담하면 안 된다고

김 선생 웃기는 것을 평소 내 모르는 바 아니나

공과 사를 가려가며 학교 생활 하란다

사유에 집안 일이라고 적고

나 미치는 줄 알았다

선생님들은 이번에 가면 청첩장 꼭 받아오라고

국사 선생 이순득이 깔깔 웃으며 놀려댄다

좋아서 함께 사는 거야 누군들 못하랴만

관희야, 너 큰일났다

싫어도 이제 살아야 한다

어저께 너는 부끄러워서 조용조용 하자 했지만

마흔 일곱에 장가를 가는데

어이 세상이 조용하랴

관희야, 너 큰일났다

싫어도 끝까지 살아야 한다

너 이제 장가가는 거

경주는 물론 논산까지 소문났다

 

 


 

 

김상배 시인 / 눈꽃

 

 

첫눈 내린 날

포장 술집에서

밤늦도록 술을 마셨는데

오줌이 마려운 아내를 따라 나섰다가

눈꽃

핀 나무 아래에서

아내의 흰 엉덩이를 보았네

참 아름다웠네

살맛이 있네

 

 


 

 

김상배 시인 / 미몽迷夢

 

 

외국어 공부가 하기 싫어 국문과에 들어갔고

공술을 실컷 마실 수 있다는 소문에

<화요문학회>의 문을 빼꼼 열었으며

얼결에 시집까지 세 권이나 냈으므로

만족한 줄을 알고 이만하면*

 

이 무대에서 그만 내려와야 할 터인데

떠나야 할 시간을 아직 모르고

네 번 째 시집을 또 준비하고 있으니

언제쯤 이 미몽迷夢으로부터 벗어나

한낮의 꽃 그늘 속을 저 고양이처럼

무심하게 한번 어슬렁거려 볼까나

아, 나는 내게 잘 맞지도 않는

문학이라는 이름의 목피木皮를 두르고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행성行星까지

여기, 너무 멀리 떠나와 버렸구나

 

-시집 『아무것도 아닌』 2021.애지

 

 


 

김상배 시인

1958년 경북 영천 출생.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신평고등학교, 영명고등학교, 논산 쌘뽈여자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 <화요문학> 동인이며, 시집 『코고는 아내』 『잘 있는가, 내 청춘』 『낮술』 『아무것도 아닌』 『길, 끝에서 만날』 등. 화요문학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