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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경 시인 / 꿈(夢)
여행 중이라 쓴다 풀어헤친 머리에 바람을 두르고 돈키호테가 지난 길을 따라서
무딘 발톱으로 존재하듯 존재하지 않는 껍질을 깨고 체온이 저온인 생은 눈 뜨면 꽃이 지고 눈 감으면 비가 내려 달 먹은 호수를 건너면 울음이 떨어지지
미완성 가계도를 열면 빨강머리 엘리스가 맨발로 춤을 춰 강 따위 숲 따위쯤이야 내겐 한 번도 건너지 않은 공중이 필요해 저녁이 노을의 멱살을 끌고 올 때 금 간 시간이 나무 그림자를 찍을 때 나는 제목 없는 책 속으로 금지된 방언을 외며 문을 두드리지 이건 상상이야, 꿈이야
눈동자에 꽂힌 수평선을 박차고 공중으로, 공중으로 겨드랑이를 간질이는 저 투명함
그래! 나는 새였어
박민경 시인 / 직감의 하루
그때 나비가 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애벌레 컬렉션을 하는 사람은 고치의 세계를 모르지 스스로 만든 동굴에서 꿈꾸지 않고 자는 법을 모르지 입이 무거워지면 당연한 것들이 불완전연소 되어 까무러쳐 고치는 꽈리로 부풀고 어른은 아이가 되고 싶고
아이는 어른이 되고 싶어 나비를 기다린다 발이 빠른 세상은 감성이 나팔꽃을 피워 어제를 지우는 오늘도 모르면서 마른 꽃 위를 맴도는 나비처럼 우린 꿈꿔
추상적인 것은 쓸모없는 시대에 감정 없는 눈물을 강요하는 시대에 슬픔 따위 개나 먹으라고 한 끼 발자국 찍게 하는 골목 모퉁이 무료급식소 햇빛 대신 비를 맞는 늙은 사내 바람 빠진 고치처럼 찌그러질 때
그때 팔랑팔랑, 나비가 난다 말하는 사람이 있다
-『공정한 시인의 사회』(2019, 3월호).
박민경 시인 / 끈을 잇는 거짓말
-여기서 표정으로 나타나고 상상이 되고 이해되고 떠난 몸으로 돌아오는 어느 시선의 직관(페르난두 페소아)
피아노 치듯 거미가 다리를 벌린다 가로둥 빛이 잠식하는 거리 추위가 몰아친다고 예보가 말했어 굴러가는 입들을 본다 어디선가 빠져나온 일들이 바람 따라 구른다 내 입일까 네 입일까 깊이도 없이 텅 빈 바깥을 꿈꾸는 사람들이 모이는 겨울 숲 나뭇가지에 걸린 거미줄을 타고 내려와 또 다리를 벌린다 검은 건반을 눌리듯 힘을 주고 집을 짓는다
저기 아프리카를 건넌 달이 혀 밑 숨겨는 말을 던져 이봐, 거미라는 놈은 음흉해 흥이 날 땐 다리를 비틀어 꼭 '라' 음을 빼먹고 집을 짓거든
말라버릴 때만 죄짓는 글자 말고 저녁이면 도망가는 노을 말고 혀 없이도 굴러가는 입말고 더 이상 성스러울 것 없는 자리에서 어젯밤 현질하다 손해 본 게임 말고
그렇군! 거미를 쳐다보는 순간 얼어버린 거짓말 하나 툭 입술 위로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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