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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웅 시인(광주) / 산책
그날도 무작정 걷는 날이었다
길이 아닌 것처럼 무심하게 놓여 있는 길이 미처 펼치지 못한 안부처럼 남몰래 굽어 있었다
직선으로만 전진했다
이상하게도 곡선구간을 통과했고 이미 방향 감각을 잃었다고 우리는
생각만 했다
속속들이 보이는 정면은 항상 보이지 않는 후면보다 걱정이 많아서 미리 눈을 감았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을 다물었고
그 순간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고
직선으로만 생각했다
아무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지나온 길이 조용히 어려워지고 있었다
-김포신문 2023/10/20 기고
김정웅 시인(광주) / 북극 항로 깨뜨려야 해 가려는 마음조차도 배가 다닐 곳은 못돼 빙하는 단단한 벽 방위를 잃고 떠다니는 마음들이 모인 얼음 기둥들로 가득한 바다를 건너가고 싶어 빠른 길 수에즈 운하를 두고 쇄빙선을 찾다가 결국엔 늦는데도 더 늦을 텐데도 바다를 깨뜨려 나아가야 하니까 배가 달려야 하니까 개척한다는 것은 결국은 누구에게는 등을 보여야 하는 일 등을 돌리는 일보다 등을 보는 일이 힘들었던 기억 번져 가는 뜨거운 상념이 빙하 속에 차갑게 갇히는 시간 나침반이 N극을 잃은 낯선 북극에서 S극만이 서성거리는 우리의 좌표는 해빙되고
김정웅 시인(광주) / 시를 찾아서
오백 원 주워서 모금함에 넣었는데 땡그랑 소리가 난다 시상(詩想)을 주워서 시에 넣었는데 아무 소리가 나질 않는다 잘못 맞춘 퍼즐처럼 빼내려고 해도 출구가 작아서 나오지를 못한다
구멍 뚫린 메리야스를 입고 폐지를 수거하러 다니는 할머니 원가에 가게를 정리한다는 길 건너 옷가게를 기웃거린다 오백 원으로 살 수 없는 할머니의 새 메리야스 속으로 시가 떨어지는 소리 할머니의 구멍 뚫린 메리야스 사이로 시가 예쁘게 얼굴을 내민다.
김정웅 시인(광주) / 백야도 45번 집
도선(渡船)으로 오 분 걸리는 그 오 분만큼의 배 삯 오백 원을 건네고 갈 수 있는 백야도
주인아저씨가 생삼겹을 떼어 왔다고 오 분 동안 도선(渡船)에 소문을 내면 백야도 게으른 갈매기가 오일 동안 소문을 퍼 나르는 섬의 유일한 45번 수퍼 집
뒷마을 화태리 할머니는 45번 집을 나오며 막걸리 한 사발 트림으로 게으른 것들이라며 애꿎은 갈매기만 내쫓는다
막배가 끊긴 6시 누군가 흘린 인정이 묻은 탁자 위에 컴컴한 그림자 덩그러니 앉아 화태리 할머니가 먹다 남긴 김빠진 막걸리를 홀짝인다
사위처럼 손님 드문 45번 집 게으른 갈매기들이 슈퍼 앞을 서성거리다 돌아서는 해거름 점차 불이 밝아지는 등대 너머로 섬사람들의 발걸음이 조용하다.
*백야도: 전남 여수 화정면에 있는 작은 섬
김정웅 시인(광주) / 첫, 진달래
벌써 아프다, 봄바람이 가져온 연붉은 기다림이
꽃망울 비명소리를 덮는 산자락 바람이 아직차다.
김정웅 시인(광주) / 말들에게 고함
꺼내지 못한 말해서는 안 되는 말들로 서툴게 기억되는 그런 날들이 어색하게 서랍 속에서 건조되어 갈 때 낯선 바람에게 괜히 말을 걸어 본다 낡은 교회 양철 지붕 아래 처마에 고인 숨죽인 말들 시골 간이역 창가 책상 위 화분에 내린 느린 말들 여고 운동장 소나무 아래바위틈에 끼인 재잘거리는 말들
전혀 의도하지 않던 곰팡이 쓴 말들에게도 내 곁을 스쳐 지나간 말들과 진지하게 내 뱉은 말들과 이제는 화해하려 한다 어제 지나온 자리에도 마음을 베이지는 않았는지 혹시 나만 아픈 건 아닌 건지 속내를 들키고 만 자리에는 사춘기 소년의 뺨처럼 노을만 붉게 물든다.
김정웅 시인(광주) / 그랑제떼 애상
발레리나의 손짓에 옥타브 한음이 처연히 더 오르고 몸짓은 허공으로 날아오르기 시작한다
어쩌면 지극하게도 가벼웠을 비장함이 말 못할 중압감으로 터져 나오기에 말문은 급기야 막힌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좌절의 가슴을 두드리며 리듬을 타기 시작한다
관객의 오감이 그녀의 손 끝, 발 끝 한 끝 떨림에 집중할 때 아무도 모르는 짧은 쉼 뒤의 중력을 거스르는 뜀이여, 울림이여, 포효여,
거꾸러지는 아픔을 애써 감추는 슬픈 그랑제떼여.
*그랑제떼-발레에서 다리를 앞뒤로 차올리는 점프 동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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