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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선 시인 / 길 - 山詩 8
먼 산이 내려와 고요히 누운 연못 위로 개구리 한 마리 헤엄쳐 간다
세상을 물으려 찾아가고 있다
탁발승 하나
-시집 <산시> 1999
이성선 시인 / 물 위에 달빛 붓으로 - 山詩 31
가랑잎 종이 위에다 평생 이름을 적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슬픔이더냐 차라리 실컷 물 위에 달빛 붓으로 글을 쓰겠다
-시집 <산시> 1999
이성선 시인 / 꽃 한 송이 - 山詩 35
꽃잎 속에 감싸인 황금벌레가 몸 오그리고 예쁘게 잠들 듯이
동짓날 서산 위에 삐죽삐죽 솟은 설악산 위에 꼬부려 누운
초승달
산이 한 송이 꽃이로구나
지금 세상 전체가 아름다운 순간을 받드는 화엄의 손이로구나
-시집 <산시> 1999
이성선 시인 / 고요하다
나뭇잎을 갉아먹던 벌레가
가지에 걸린 달도 잎으로 잘못 알고 물었다
세상이 고요하다
달 속의 벌레만 고개를 돌린다
이성선 시인 / 큰 산 앞에 춤을 추다
그는 혼자 밖에 나가 큰 산 앞에 춤을 춘다 먼 곳에 희미하게 달 뜨는 시간이나 깜깜한 그믐 별이 뚝뚝 떨어지는 자정 넘어서 모두가 잠든 후면 혼자 마당에 나가 산 앞에 춤을 춘다. 님을 향해 그 분과 마주 춤을 춘다. 하루 한 번 눈물도 없이 가장 깊고 가장 고요한 시간 위에 덩실덩실 두 팔 들고 산과 마주 하여
이성선 시인 / 논두렁에 서서 갈아놓은 논고랑에 고인 물을 본다. 마음이 행복해진다. 나뭇가지가 꾸부정하게 비치고 햇살이 번지고 날아가는 새 그림자가 잠기고 나의 얼굴이 들어 있다. 늘 홀로이던 내가 그들과 함께 있다. 누가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다. 모두가 아름답다. 그 안에 나는 거꾸로 서 있다. 거꾸로 서 있는 내 모습이 본래의 내 모습인 것처럼 아프지 않다. 산도 곁에 거꾸로 누워 있다. 늘 떨며 우왕좌왕하던 내가 저 세상에 건너가 서 있기나 한 듯 무심하고 아주 선명하다.
이성선 시인 / 나무 나무는 몰랐다 자신이 나무인 줄을 더욱 자기가 하늘의 우주의 아름다운 악기라는 것을 그러나 늦은 가을날 잎이 다 떨어지고 알몸으로 남은 어느 날 그는 보았다 고인 빗물에 비치는 제 모습을 떨고 있는 사람 하나 가지가 모두 현이 되어 온종일 그렇게 조용히 하늘 아래 울고 있는 자신을
이성선 시인 / 달빛 발자국 - 山詩 45
달빛이 산길을 쓸자 냇물처럼 길이 산 위에 떴다
너구리 까투리 고라니 산밤 찾는 들쥐들 발가락에 달빛 묻어
어떤 발지국 줄은 산 위에서 별 쪽으로 사라지고 다른 줄은 마을로 내려오고
또 한 줄은 내 잠 속으로 숨어들어 꿈의 세상에 발자국을 찍었다
내 뼈골 속에 흩어져 달빛으로 찍힌 작은 하늘 흔적들 - 이성선 시집 <산시> 1999
이성선 시인 / 해 지는 소리 - 山詩 47
향기 있는 사랑이 그립다 해 지는 소리 남아 있는 산 쪽으로 머리를 두고 잔다 산이 저무는 시간 물 속에 들여다보고 앉아 있으면 세상은 깊어지는데 사람들만 야단이다
꽃이 지면 허공은 새롭다 새 그림자 지나가면 물이 더 맑다 남으려 하는 것은 욕된 것 머물려 하는 것은 아직 너를 넘어서지 못한 것 삭발한 산을 따라 기다리는 이 없는 곳으로 떠돌리라
물 속 빈 산에서 들리는 당신의 독경소리 찾아 - 이성선 시집 <산시>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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