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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명보 시인 / 벗꽃 지다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17.

박명보 시인 / 벗꽃 지다

 

 

대개는 답신이 없는 편지였다

 

멀어진 날들에 봄 꽃 한 잎 부치는 날

 

-이게 다예요

변명처럼

아니, 길 끝의 비명처럼 벗꽃이 지고

자꾸만 그를 잡고 흔들어대던

바람의 우듬지는 제 안의 천공으로 길을 낸다

 

만개한 벗꽃나무 아래, 사람들은 떠나지 않는다

꽃 지고

주름진 검은 몸피 드러날 때쯤에야

그 상처 뒤로 하고 자리를 턴다

 

바람이 변주하는 봄의 소나타

낮은 음계로 날아오르는 결별의 화음앞에서

 

보내야 할 때

한 번도 아름다운 적 없었던

늑골의 허기를 누른다

 

점묘법으로 걸어오는 어둠

낡은 풍경을 찢고 나온 듯 뒤늦게

분주한 어린 꽃의 뺨을

저녁의 푸른 손이 감싸 쥔다

 

창백하게, 단단해지는 꽃향기

허공이 품은 씨앗이다

 

-『열린시학』 2012, 봄호

 

 


 

 

박명보 시인 / 나의 이글루

 

 

퇴행이 좋은 밤이에요

멀리 삼나무 숲을 지나온 바람도 길을 잃는 여기,

 

몇 억 광년을 직선으로 달려온 별의 푸른 검조차

이 지붕위에선 둥글게 휘어지죠

 

지금 내게는,

희고 높은 바람벽* 같은 이 없어

밤새 승냥이 울음 섞인 어둠만 쪼아 먹어요

 

너무 오랫동안 둥글어져 왔어요

 

이곳에서의 일기란

알약을 삼키듯 매일 흰 달 하나씩 삼키며

백야를 걷는 것이라서,

 

사랑에 더 참혹해야 했어요

손끝에 번지는 핏물처럼

 

얼음벽돌 한 장 얹을 때마다 금기 한 장씩 눌러놓고

루미날, 그 백색의 오해처럼

참 하얘서 좋았거든요

 

내 어깨에서 자라는 늑대의 털과

조금씩 흘러내리는 섬광의 날들이

직조되는 밤

바다표범의 미끈거리는 주술을 신고

 

인디언의 달까지

어디 한번, 미끄러져 볼까요?

현명한 당신, 참 어리석게도!

 

*백석의 시에서 변용함.

 

 


 

 

박명보 시인 / 가시연꽃

 

 

불안은 몸을 부풀린다

저보다 큰 덩치의 개를 만난 고양이가

온몸의 털을 세우듯,

 

빈손일수록

허기질수록

가시는 잎맥마다 돋아난다

 

그러므로 가시연꽃, 저 가시는

돌멩이처럼 쉬이 가라앉지 못하는 자존심

어느 역에도 닿지 못하고 떠도는, 무임승차한 여자의 불안한 눈빛

한강다리 난간에 걸쳐진 투신 직전 사내의 망설임

끝내 자신을 향하는

응축된 상처

핏빛 관冠이다

 

 


 

 

박명보 시인 / 버려진 우산의 효용성

 

 

받아치는 일에만 골몰했었다

바깥을 들이는 일은

조금씩 무너져가는 일이라 믿었으므로

 

희박한 공기 속에서만

내 사원의 기둥들은 뼈대처럼 빛났다

침묵 속에서 견고해지는 은빛 창살들

 

꽃의 기원은 중생대 백악기라는데

나무도 잎도 아닌

그 작은 꽃잎이 머금은 수분으로

푸른 초원이, 숲이 무성해졌다는데

 

오랜 가뭄 끝, 가을비 내린다

촘촘한 방충망 너머 화단이, 꽃들이

젖고 있다

몸을 열고 있다

그 옆 아스팔트 위

제 속을 뒤집어 꽃의 자세로 누워있는 보라색 우산 하나

 

저도 이제 꽃인 양

떨어진 도라지꽃을 흉내내보는 것인지

부서진 제 흉강 속으로

그렁그렁

빗물 들이고 있다

 

 


 

 

박명보 시인 / 세라핀*

 

 

여기 갈랴크인**

바람의 음절을 채집하는 자

뚝 뚝 마디를 분질러 상처의 즙을 핥는,

 

핏빛 모란의 목을 꺾어드는 밤

비릿한 희망이 행적을 감출 때

배반한 사내의 구레나룻과 두툼한 입술 선을 그려 넣지

 

이루어지지 않는 기도와 사자의 눈물 한 방울

젖처럼 통통해진 슬픔을

한 잎 한 잎기다란 밤 속에 이겨 넣지

 

불면의 꿈틀대는 색채들 분열하는 눈동자들

검푸른 밤의 이젤 위에서

꽃잎 하나 낳을 때마다 조금씩 희미해지는

 

그건 나예요, 원시의 샤먼

밤과 안개의 정령 동쪽이며 서쪽인,

곰과 이리 독수리이며 까마귀인,

태초의 신들이 내 정수리를 뚫고 나올 때

 

원형의

거세되지 않는 질문이에요

4 제곱 제곱미터의 납작해진 홀로그램

 

바람이 불고 있나요

나는 홀로 걸어가고 있나요

암전된 세계를 떠다니는 거기, 당신의 눈동자 속에

조각모음되는 내가… 있나요

 

*세라핀 루이스(Seraphine Louis) - 세상을 떠난 후에야 존재가 알려진 20세기 프랑스 여류화가, 강렬한 색채와 꿈틀거리듯 살아있는 느낌의 잎과 꽃을 주로 그렸다. 만년에 발광하여 요양원에서 사망함.

**갈랴크인 - 체호프의 여행기 『사할린섬』에 나오는 원시부족으로 길이 나 있어도 편안한 길을 거부하고 수풀을 헤치며 걷는다.

 

-『시인시각』2011, 가을호 발표

 

 


 

 

박명보 시인 / 아바타 없는 아바타

 

 

지상에서의 마지막 태양을 물고

새들이 사라져요

순례의 끝인 성지,

영혼도 노래로 울리는 곳

그곳을 페루라 말한다면

 

나 아직 페루에 가지 못했어요

 

몇 마디의 농담과 소량의 친절로 마감된

도시의 하루를 걸어두고, 잠시

떠나고 싶죠 자동차 긴 불빛 사이를

어두운 회랑인 듯 걸어서

 

그리곤 바다에 닿고 싶죠

언젠가 내가 떠나왔던

바다의 소리를 기억해요

눈꺼풀이 생기기 전, 발톱이 자라기 전

그 알몸의 출렁임을

 

사람들은 쉽게 잊혀져요

클릭 하나로 변환되는 파일처럼

 

잘라내고 싶은 건

우아하게 물결치는 머리와 긴 속눈썹

나 아닌 내가 걸어가고 있네요

펄럭이는 옷자락이 붉은 신호등에 걸리네요

치정 같은, 오류 같은

아바타*없는 아바타

 

나, 아직 페루에 가지 못했어요

 

*아바타-인도어로 지상에 나타난 신의 분신, 사람의 내면에 있는 신성을 뜻함

 

-젊은 시' (문학나무)에서

 

 


 

박명보 시인

충북 영동에서 출생. 한신대학교 평생교육원 문예창작교실 수료. 경기평생교육학습관 문예창작반 수료. 2010년 《시산맥》을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