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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전재섭 시인 / 핏빛 저녁 식탁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17.

전재섭 시인 / 핏빛 저녁 식탁

 

 

 검은 피부가 아름다운 가난한 전업시인, 고운 목소리 그녀로부터 생일저녁 초대를 받았다.“ 생고기가 먹고 싶다”는 말과 함께 나에게 보내온 초청장 청초한 코스모스 꽃잎글씨에 내리는 달빛이 너무 차다.

 

 영화 속 폭력에도 눈을 감고 초록별과 계곡물 소리를 좋아하는 나, 오늘밤 나를 접고 칼을 든다. 외양간에서 검은 암소를 끌고나와 뒷동산 300년 묵은 붉은 소나무에 붙들어 매고 목줄에 칼을 꽂는다.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 피, 피, 피, 서녘 하늘이 핏빛으로 물든다. 가슴을 저미고 허벅지를 저미고 꽃 등심과 하얀 사골을 발라내어 붉은 비단에 포장하여 너에게 보낸다. 핏빛 저녁 식탁 붉은 놀은 타오르는 나의 피다.

 

 바람 불면 날아갈 듯 눈망울만 점점 초롱초롱해지는 너, 고운 목소리 너의 노래를 듣고 싶다. 생일저녁“ 생고기가 먹고 싶다” 던 너, 오늘밤 너에게 보내는 나의 선물 키보드 소리만 붉은 노을에 지고 있다.

 

 


 

 

전재섭 시인 / 파도

 

 

그대는 파도였다

 

파도 속의 작은 배

바람에 휩쓸려

닻이 부서지고

밤새 울부짖었다

 

파도는 자면, 그뿐

 

파도에 할퀸 상처는

파도를 기다린다

 

 


 

 

전재섭 시인 / 왜 이 아침이 이리도 나를 설레게 하는가

 

 

왜 이 아침이 이리도 나를 설레게 하는가

전설의 바람이 나를 끌고 가기 때문일까

생은 아름다운 것 작은 깨달음 때문일까

그대 때문일까

왜 이 아침이 이리도 나를 설레게 하는가

 

-시집 <전설>에서

 

 


 

 

전재섭 시인 / 그와 나 2

 

 

그와 내가 같은 점은 앞머리가 빠졌다는 사실이다

그와 내가 다른 점은 그는 발모제를 처방대로 매일 먹고

바르고

나는 가끔 생각나면 먹고 바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머릿결 휘날리는 사수가 되었고

나는 그냥 머리 빠진 조수가 되었다

그와 네가 같은 점은 글쓰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멋진 시인이 되었고

나는 영원한 연습시인이 되었다

그와 나는 아름다움을 좋아하고 사랑이 있었다

그는 사랑을 만난 이후에는 그 사랑만을 했고

나는 사랑을 만난 이후에도 여러 사랑을 했다

그는 고요한 달빛을 받으며 시를 쓰고 있고

나는 어둔 밤 인사동 골목을

술에 절어 걷고 있다

여기서 나는 그와 당신*일 수 있다

그와 나를 바꾸어도 상관없다

습관이 팔자를 만든다

 

* 이 시를 읽는 독자

 

 


 

 

전재섭 시인 / 전설의 섬 아카베버드랜드*

 

 

A. 지중해 크레타 섬 동남쪽에는 남매인 왕자와 공주가사랑을 하다가 벌을 받아 새가 되어 추방되었다는 전설의 섬이 있다. 아테네와 카이로 베이루트가 등거리에 있어 아카베버드랜드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섬에는 두 마리의 새가 산다. 한 마리는 딱따구리이고 또 한 마리는 동고비이다. 딱따구리는 날마다 아카시아 생나무 기둥에 구멍을 뚫고 동고비는 그 생나무구멍이 커지면 축축한 진흙으로 입구를 좁히고 알을깐다. 구멍을 뚫다가 알을 까다가 지치면 섬소사나무이 가지 저 가지로 날아다니며 노래를 부른다.

전설의 섬은 딱따구리 구멍 파는 소리로 해가 뜨고 동고비 알까는 소리로 달이 진다.

새들은 공주와 왕자로 환생을 꿈꾸며 살아 있는 자의슬픔 또 다른 업을 쌓고 있다. 전설의 섬에 사람은 살지 않는다.

 

B. 구리와 고비는 전설의 섬에서 매일 노래를 하네

섬소사나무 잎새에 내리는 아침이슬로 서로의 부리를닦아주며 노래하고 밤이면 고요히 흐르는 별빛을 바라보며 시를 노래하네. 들국화 향기 마시며 서로의 눈속에 빠져드네. 구리와 고비가 사는 전설의 섬은 서로의 노래가 하모니에 이르는 초절정의 세계를 아는 새들만 사는 나라라네

 

* 아카베버드랜드 : 시인이 만든 상상의 섬

 

 


 

전재섭 시인

1996년 《시조문학》으로 천료(시조). 《정신과 표현》으로 등단(시). 현재 『시와 세계』 시학회장. 2012년 화백시문학상 수상. 현재 한국정책개발학회 부회장(행정학박사). 이상시문학상 운영위원. 『내일의 시』 문학회 회장. 행정공제회 홍보대사. 서울시립대학교 겸임교수, 경복대학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