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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락 시인 / 반려울음
슬픈 시를 쓰려고 비고프다 썼는데 배곺으다라 써졌다 곺 뒤에 커서를 놓고 백스페이스키를 누르자 정말 배가 고팠다
뱃가죽이 등에 붙어버렸나? 배가깜박거리기 시작했다 고프다 쓰자 배가 없어졌다. 둥이 구부러지는, 굴절된 뼈 같은 오후
그래, 슬픔은 늘 고프지 어딘가가 고파지면 소리 내어 울자, 종이 위에 옮겼다
......
세면대 위에 들니를 내려놓듯 덜컥, 울음 한마디 내려놓고 왔습니다 그뿐인가 했더니 옆구리 어디쯤에 쭈그리고 있던 마음, 굴절되어 있네요
거품을 집어삼킵니다 씹어도 건더기라곤 없는 튀밥 혓바닥이 마르고, 버썩거립니다
그래요. 뭐든 버썩거릴 때가 있어요 잠깐 눈 돌리면 쏟아지기도 하고....
난 수년 전 아이 몇몇 쏟아버린 적도 있어요
그땐 내 몸도 깡그리 쏟아졌던 것 같아요 마지막 손톱을 파낼 땐 눈에도 금이 가고 있었죠
얘야, 눈빛이 많이 말랐구나 눈을 뜨고 있는 게 아니었어 내가,
손가락을 흘리고 다니지 말랬잖아요 근데 왜 까마귀 목소리가 흘러나오는지... 보송보송 털이 난 꿈속에서
....
배가 고프단 얘긴 줄 알았는데, 그림자 얘기였어
부품해진 그림자론 날아오를 수 없다. 어떤 돌은 그림자도 생겨나지 않는다. 죽은 후론 배꼽도 떠오르지 않는다. 쏟아 졌던 아이들이
처음으로 수면에 떠올라 배꼽은 어디 있을까? 찾고 있을지도 모르는
깨지지 않는 것도 깨진 것이 돼 버린 오후 이렇게 비좁고, 나는 깎아지른 맘뿐이었나
몇줄 적지 못한 종이 한장 찢어, 공중에 날리는
-202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
이선락 시인 / 기분
오후가 되자 놈이 반대쪽으로 돌아누웠다 전봇대 옆에 세우니 훌쭉해졌다
꽃잎이었나 나비였나 무슨 빛깔이었지 왜 각막이 가려웠지, 눈도 없는 것이
*
놈이 거기까지 따라온 거 있지 개 같은, 옆구리까지 달고 왔지 뭐야 짐칸에 붙어 쿨럭거렸어
호계 분기점에서 우측깜빡이, 5톤 트럭 앞으로 들어서는데, 묵직한 클랙슨이 덤벼들었어 뒤통수를 쥐어 박혔는데, 논바닥으로 구를 뻔 했어
(찰나, 짐칸의 놈이 경기를 했나봐. 애완용 얼굴은 어디로 가버렸을까, 미친개가 돼버렸어)
쥐어 박힌 뒤통수를 꺼내 자근자근 밟데. 5톤의 이마가 파랗게 질리데 그때였어 짐칸에서 하얀 쥐구멍이 새어나왔지 빤질빤질하게 닳은 쥐새끼들
구멍에 대해, 잠시 뒤집어진 놈에 대해 사라진 애완용에 대해
돌아보면 장승처럼 서있는 5톤의 표정에 대해, 생각하다가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어 (의사는 마그네슘 결핍이라 했는데…)
뒤통수에서 또 5톤 클랙슨이 발칵, 길게 짧게 길게
저런, 마그네슘! (ㅆㅂㄴ, ㄱㅆㄲ , ㄷㅈㄴ…)
우회전, 직진, 급정거 완전히 뒤집힌 놈이 5톤 클랙슨을 깔아뭉개는 소리가 들렸어. 옆구릴 콱, 콱, 콱
난, 창밖으로 왼손을 흔들어주었어 애완용 엄지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우고 다만 흔들어주었어
클랙슨이 之 之 之 之 , 거의
이선락 시인 / B 컷 - 앵무새
1 구겨진 기분을 집어 들었다
무성영화 속, 모자를 뒤집어쓴 해바라기 씨를 까먹는, 여자
2 철장 안 앵무새 한 마리, 씹었던 해바라기 껍질을 또 뒤적거린다
- 넌 그게 문제야!? 어제 했던 말을 질문처럼 되돌려놓는다
휘어진 낱말을 똑똑 잘라 비닐봉지에 담아둔다
3 이빨자국 묻은 사과를 건넸다 안으로 말린 자국만 쪼는 새, 삼키지도 않으면서 과육을 뜯어낸다
봉지 속에 혓바닥을 뱉다가 사과조각을 바닥에 떨어뜨린다
4 꿈속인데도 새소리는 똑같다 자꾸 들으면 발가락이 간지럽다 웃고 싶은데, 진물이 묻어나는 리듬
5 발가락을 긁었다 절벽으로 이어지는 꿈
6 허방에 발을 잘못 디딘 새소리, 뒤집히고 비닐봉지 찢어지고
새소리 쏟아진다 공중을 선회한다
철망에 걸려 파닥이는 새떼
7 사진을 포갠다 한 번 접고, 두 번, 세 번 접힌 머리 또 뒤집어지려는, 찰나
접지 마, 여긴 화면 밖이야
이선락 시인 / 낯선 부호로 오래된 애인에게 말하기
지난겨울의 C컷을 집어 올렸다 뒤에 비친 낱말의 목을 따고 껍질을 벗겼다 뒤집힌 컷마다 새끼 뱀들이 쏟아졌다
미끈거리는 놈들을 죄다 묶어 공중에 매달았지만 거울 속으로 사라진 ( )
목구멍이 미끈거렸다 말더듬이였던 손가락으로 코를 문질렀지만 얼어붙은 낱말들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겨울이 거울 속으로 질주하는 소리는 역방향이었을까?
메아리들이 새어나왔다 평면엔 구멍이 뚫리고 삐뚜름, 더듬다 뱉은 말들은 외톨이로 태어나 거울 뒤편으로 숨어들었고 얇게 펴보면 꽃뱀들은 똬리를 틀기도 전에 지면으로 쏟아졌다
납작해진 뱀들 혀가 갈라진 문장 몇 개 똬리 지고 있었고
더듬거리던 기후들 뻣뻣해지자 해진 낱말엔 성에가 끼기 시작했고
지붕도 없는 부호들이야, (ㅊ ㅓ ㅅ ㄴ ㅜ ㄴ ㅍ ㅕ ㄴㅈㅣ, ㅅ ㅗ ㅅ ㅣ ㄹ ㅈㅓ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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