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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일 시인 / 젖은 돈
빨래를 탈탈 털어 옷걸이에 걸다가 작은 아이 반바지 호주머니에서 천원 짜리 지폐 다섯 장을 꺼낸다 어제 다녀간 손님이 준 것이다 한 장 한 장 펴서 베란다 바닥에 깔아놓는다
햇볕에 젖은 돈을 널고 있는 아침, 하루벌이 구겨진 종잇장을 아이들 몰래 장롱 깊숙이 쑤셔 넣으시던 젊었을 적 어머니도 옥상에서 돈을 널고 계신다 이불 속에서 종이돈이 부풀어 오르는 동안 장롱 속 어둠은 소녀의 가슴에 봉긋이 쌓여 갔다 작은방 문은 안으로 걸려 있고 벌어진 문틈으로 소녀의 울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누런 구들장판에 축 늘어져 있는 소녀와 아버지 발 밑에 깔린 부러진 회초리도 언뜻 보인다
아버지는 그날 아침내 뒷간 똥물에서 소녀가 훔쳐 내던진 종이돈을 한 장 한 장 건저내셨고 어머니는 몇 번이고 맑은 물에 헹구어 내셨다 똥물이 첨벙거리는 뒷간 깊숙한 곳에 소녀가 묻어 버리고 싶었던 돈 뭉치 냄새 장롱 속을 빠져나온 묵은 어둠을 나는 지금 내 베란다 햇볕에 말리고 있다
(현대시학 2004 12월호)
박윤일 시인 / 문 빌리지 Moon Village*
밤새 뒤척이던 당신 새벽 문을 열고 나갔다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난청이 문틈으로 휘몰아쳤다 당신에게서저 달까지 몇 정거장이나 될까 '천천히 와도 돼요' 나는 이불 속에서 자음모음을 만지막거렸다
폭풍 뒤 맑은 저녁을 가로질러 나는 퇴근을 한다 18평 아파트 매매문서가 공원 벤치에 펼쳐져 있다 포기할 수 없는 주소에 세간들이 달그락달그락 환한 계절은 지나갔는데 아직 흰민들레꽃 止止 않았다
내일은 왕순자부동산에 들러 달동네 방을 구해야지 저 초승달의 부엌은 어제보다 넓네
自己야, 척추에 박힌 철심 녹아 흐르기 전 구멍 난 밤하늘에 잃어버린 집을 지어야지 나는 지나간 계절을 시멘트에 섞고 벽돌을 나를 테지 먼 훗날은 당신 오른쪽 둥근 눈썹부터 활짝 차오를 테지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새집이 자꾸만 기다려진다
* 유럽우주국(ESA)은 2030년 완공 예정으로 달 표면에 200명이 입주할 수 있는 영구적인 우주기지국인 문 빌리지(Moon Village)를 짓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예술가』 2019-겨울호
박윤일 시인 /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
이 집 주인은 갑자기 길 떠났나 보다 밤새 근육통을 앓은 날씨 먹다 남은 두부가 식탁에 놓여 있다 이황이 머물던 진경산수를 헐값에 장만했다더니 주인은 천 원 속 암자까지 신발도 없이 걸어갔을 것이다 빈센트의 구두 한 켤레 문 앞에 그대로 있다
이 집 주인은 새벽에 폐지를 줍는 사람 손수레 가득 상자들의 자리싸움 사발면 위에 초코파이까지 얹으면 천 원이 석 장 언제 저리 관직 마다한 귀한 소나무 심고 물고기 뛰노는 전원주택 지었을까 식탁에 놓여 있는 정원 한 장은 낙화의 시간을 지나왔다
폐품 넘쳐흐르는 밤의 강가에서 나룻배 가득 지폐 석 장 싣고 당도한 곳은 먹빛 바랜 집 창문에 방충망 걸어 놓은 거미가 밤새 먼지 세는 곳 나는 주인이 미처 끄지 못한 변방의 촛불을 읽는다 상한 두부는 그 자리에 두어도 좋다고 적혀 있다
주인은 풍경화의 소실점 되어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를 일 꼬깃꼬깃 구겨진 구름 한 점과 허공의 소유권 다투고 있을지도 모를 일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는 겸재 정선의 그림으로 천 원권 뒷면에 인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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