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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호 시인(경주) / 질통
재개발 철거지역 쿵쾅거리는 굴착기 기세에 벽 속 갈비뼈에 금가는 소리가 난다
오후 내내 지문 없는 손톱 물어뜯는 그에게도 등에 혹처럼 붙은 질통이 그의 이름인 시절이 있었다 어둠을 치우듯 새벽밥을 비우고 좁쌀 같은 모래나 자갈 수 없이 부려 놓으면 한 층씩 자라는 층계 위로 붉은 해가 떠올랐다 칸칸 늘어나는 벽 수 만큼 피로가 쌓여가고 어깨 위 앵두꽃 몇 잎 피어났지만 함바집 청송댁의 은근한 눈웃음, 그나마 견딜만한 하루였다고
이제 그가 져 나를 공사판은 없다 질통 대신 꿉꿉한 달세방 구들장 지고 있는 가슴속, 종일 불평하던 바람이 빠져나가자 입안에 모래알이 쏟아진다 자꾸만 한 쪽으로 기울어지는 부엌으로 가다 쪽문에 걸린 하늘을 본다 절뚝거리는 발등 위로어둠은 쉴 새 없이 내려앉고
깊어가는 상처만큼 쑥쑥 올라가는 아파트 공룡처럼 떠있는 타워크레인에 끼인 달의 어깨가 뭉텅하다
김일호 시인(경주) / 나는 열아홉 살이에요
엎드려 양말도 신을 수 있어요 부목을 짚고야 겨우 서 있을 뿐 그래도 키는 자라일 미터가 넘는 걸요
잎사귀 위에 뾰루지, 여드름도 지나갔고 탱탱하게 부풀어 오르는 우윳빛 가지가 햇살에 반질거려요 발가락이 근질거려요 고분공원 돌담길 벚꽃친구들 까르르 웃고 강변도로 길섶엔 개나리들, 차를 따라가는 뜀박질 저렇게 봄이 낭창낭창 걸어가는데 창가에 기대어 햇살만 찢어먹는,
나가고 싶어요 새가 날라주는 먹이만 받아먹을 순 없잖아요 언제까지 엄마 등 타고 다닐 수 있겠어요 이제 엄마를 태우고 싶어요 운전면허를 따야겠어요 운동도 해야겠죠 아침마다 지나가는 듬직한 구름 들고
다리 힘을 키워요 팔이 천장에 닿으려 해요 가슴이 부풀어 올라요 아빠! 나도 이제 열아홉 살인 걸요.
-시인정신 2014년 겨울호
김일호 시인 / 줄
아버지는 늘 줄을 잡고 싶어 하셨다.
줄이 없어 너희들 좋은데 취직 못시킨다고 .그 노무 줄이 있어야 하는데. 고래 힘줄 같이 튼튼한 줄 하나가 온 집안 식구를 먹여 살린데이.
그러시던 아버지 동산병원 중환자실에서 알부민, 혈소판, 제비티, 스모프리피드, 등 스무 개도 넘는 줄을 달고 가쁜 숨 쉬신다. 세상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인 듯 줄 속에 난 길로 간신히 이승과 저승으로 다니시는 아버지. 저 노무 줄만 아니면 좀 살만 할텐데. 반딧불 같은 눈으로 바라보신다.
다 필요 없데이. 하느님이 놓을까? 말까? 잡고 계시는 생명줄 하나만 꼭 잡고 있으래이. 말씀 하시는 것 같다.
김일호 시인 / 담쟁이는 목탁소리로 자란다
누가 동자승을 데려다 놓고 참선을 강요하는가
영경사 담벼락 까마득한 절벽을 올라가는 담쟁이의 뒤통수가 땡볕에 벌겋다 목어의 뼈처럼 마른 손마디로 불기 한 모금 없는 적막에 매달린 담쟁이는 목탁소리로 자란다 발 디딜 틈 하나 없는 면벽 수행의 길 염불 따라 발자국을 남기며 대답 없는 벽에 쾅쾅 박은 이마의 흉터가 달빛에 아린다 오르면서 부풀었던 이파리들, 하나씩 던지며 내려가면 저만치 부처의 발끝으로 가는 금강 계단이 보일까
법당을 나와 마당을 건너는 깡마른 스님의 허리가 자꾸 굽어진다.
-시인정신 2015년 봄호
김일호 시인(경주) / 컨테이너 화실
이 화실은 화창한 볕이 있는 날에만 그림을 그립니다 눈구름 아래 웅크리고 있던 칩거를 열고 창문 밖으로 등짝을 화선지처럼 내다 겁니다 늙은 느티가 슬쩍 가지를 뻗어보지만 모델이 되는 건 언제나 열세 살 젖꼭지를 단 어린 벚나무입니다 조금은 느긋해진 햇살이 듬뿍 먹을 찍어 한 획을 쓰윽 긋자 가지에 화들짝 물이 오릅니다 지나던 바람이 휘어진 허리를 바로 잡아 줍니다. 우그러진 철판에도 먹물이 번집니다 새소리가 내려앉은 봉오리들이 환한 덧니를 내놓고 웃습니다
몇 걸음 떨어져 앉아 농담이 어우러진 채본을 베끼던 나도 어느새 그림이 됩니다 어깨에 수북이 내려앉은 꽃잎까지 다 그린 햇살이 화선지를 슬쩍 옆으로 밀어 냅니다 그림을 말아든 컨테이너, 가만히 창문을 닫습니다 저 화실 안에는 사시사철 빼곡한 그림으로 벚나무 숲을 가꿔도 되겠습니다 숲에는 샘물이 흐르고 새가 둥지를 틀었다 떠나기도 할 겁니다
그림이 사라진 컨테이너 벽 환한 여백이 출렁입니다
김일호 시인(경주) / 대추나무, 풍경을 수놓다
대추가 댕강거린다 부르터 울기 전에 내려놓으라는 말씀 사다리에 올라 볼이 탱탱한 편종에다 탐스런 눈을 맞춘다 햇살살점에다 손을 대자 여름 내내 소리 키운 종루가 먼저 부르르 떤다 뙤약볕과 별들이 촘촘히 박아 넣은 경전 하나씩 받아 적으며 휘어진 하늘, 초록 귀때기 한 가질 잡아 당겨 아직 새파란 소리 한 번 울려 보려는데 종일 텅 빈 가을을 받치고 있던 바지랑대 들고 나오신, 가는 귀 먹은 어머니 너 그래 갖고 무슨 소린들 들리겠냐는 듯 꼬부라진 허리 곧추 세워 타종한다 한꺼번에 쏟아져 골목 흥건한 어머니 귀 뚫고 나온 저 소리 소쿠리 가득 담겨 들어간 대추 처마 끝 물구나무서서 풍경 소리 댕강댕강 한 철을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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