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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경 시인 / 검은 줄
파업이 길어지고 있었다
주머니엔 말린 꽃잎 같은 지폐 몇 장 만지작거릴수록 얇아졌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므로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시간,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여니 방바닥에 검은 줄 하나 그어져 있다 특수고용자로 분류된 나는 노동조합이 철야 농성 중인 회사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출입문 위에 붉은 글씨로 쓴 부적들 나부끼고 제 이름 외치며 뛰쳐나온 노란 팬지꽃
화단 위에 삐뚤빼뚤 구호를 받아 적었다 나무 기둥의 몸을 열고 나온 날개미들, 좁은 방에 검은 줄 늘려가고 있다 문 걸어 잠그고 쓰다 남은 살충제 쏟아 붓는다 혼자서 살겠다고 혼자만 살아보겠다고 고쳐 쓰고 또 고쳐 쓰던 자기소개서 개미들이 따라가며 밑줄을 긋는다 고쳐 쓰다만 자기소개서 위의 검은 줄이 흩어진다
-2013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김정경 시인 / 이 마음을 참으면 무엇이 되나
궁금했다
불쑥 침대로 뛰어드는 골목의 발자국들 스스로 머리 밀며 울던 모과나무의 비밀 연애 빨래 곱게 개켜 방문 앞에 놓고 가는 주인집 아들의 빈 밥솥 같은 연심 겨울마다 천장과 지붕 사이에 자리 펴는 고양이의 가계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 들으며 썼다 지운 글들
이 모든 것의 주인은 정말 나였던가 내어內語 가득한 하나의 세계를 읽지 못하고 떠난다
안개와 노을을 풀어놓던 폐사지의 부도 탑처럼 골목의 날씨를 만드는 다섯 채의 사이프러스와 백목련 두 채 산수유나무와 대추나무도
안녕은 안녕
-시집 <골목의 날씨>에서
김정경 시인 / 아름다운 날
버리지 않으면 얻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창밖의 햇살이 그렇고 화사한 들꽃이 그렇고 그대의 미소가 그렇습니다 내 안에 갇힌 두려움과 아집을 버리지 않으면 그대 역시 나 역시 영원한 타인으로 고이고 맙니다 그대로의 날을 내려 놓고 아름다운 날을 가져야겠습니다 그 날들로 꽃밭을 만들어 햇살 좋은 날 그대에게 드려야겠습니다
김정경 시인 / 나의 얼굴이 전생처럼
내가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갔다
울고 싶지 않아서 입속을 허밍으로 채운 날들 매달릴 곳이 차라리 사람이면 좋겠다 더 나이 들기 전에 내 집을 갖고 싶고 갈수록 병과 부음과 가까워 그날의 표정이 생겼어
맨정신으로 할 수 없던 말을 취하지 않고도 할 수 있게 됐다는 말 혼잣말에 놀라 두리번거리는 일 늘고 있지만 사람들은 놀랍도록 다른 사람 얘기를 귀담지 않는다는 걸 알아챌 무렵
이토록 서서히 멀어질 듯 사라질 듯 다가오는 것이라면 나의 사인은 희망이라고 기록해야 마땅해
아는 얼굴인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이처럼
유리창마다 낯선 얼굴이 떠올랐다가 가라앉는다
-시집 <골목의 날씨>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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