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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정경 시인 / 검은 줄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20.

김정경 시인 / 검은 줄

 

 

파업이 길어지고 있었다

 

주머니엔 말린 꽃잎 같은 지폐 몇 장

만지작거릴수록 얇아졌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므로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시간,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여니

방바닥에 검은 줄 하나 그어져 있다

특수고용자로 분류된 나는

노동조합이 철야 농성 중인 회사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출입문 위에

붉은 글씨로 쓴 부적들 나부끼고

제 이름 외치며 뛰쳐나온 노란 팬지꽃

 

화단 위에 삐뚤빼뚤 구호를 받아 적었다

나무 기둥의 몸을 열고 나온 날개미들,

좁은 방에 검은 줄 늘려가고 있다

문 걸어 잠그고

쓰다 남은 살충제 쏟아 붓는다

혼자서 살겠다고

혼자만 살아보겠다고

고쳐 쓰고 또 고쳐 쓰던 자기소개서

개미들이 따라가며 밑줄을 긋는다

고쳐 쓰다만 자기소개서 위의 검은 줄이 흩어진다

 

-2013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김정경 시인 / 이 마음을 참으면 무엇이 되나

 

 

궁금했다

 

불쑥 침대로 뛰어드는 골목의 발자국들

스스로 머리 밀며 울던 모과나무의 비밀 연애

빨래 곱게 개켜 방문 앞에 놓고 가는

주인집 아들의

빈 밥솥 같은 연심

겨울마다 천장과 지붕 사이에 자리 펴는

고양이의 가계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 들으며 썼다 지운 글들

 

이 모든 것의 주인은 정말 나였던가

내어內語 가득한 하나의 세계를

읽지 못하고 떠난다

 

안개와 노을을 풀어놓던 폐사지의 부도 탑처럼

골목의 날씨를 만드는

다섯 채의 사이프러스와 백목련 두 채

산수유나무와 대추나무도

 

안녕은

안녕

 

-시집 <골목의 날씨>에서

 

 


 

 

김정경 시인 / 아름다운 날

 

 

버리지 않으면 얻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창밖의 햇살이 그렇고

화사한 들꽃이 그렇고

그대의 미소가 그렇습니다

내 안에 갇힌 두려움과 아집을 버리지 않으면

그대 역시 나 역시 영원한 타인으로 고이고 맙니다

그대로의 날을 내려 놓고 아름다운 날을 가져야겠습니다

그 날들로 꽃밭을 만들어 햇살 좋은 날 그대에게 드려야겠습니다

 

 


 

 

김정경 시인 / 나의 얼굴이 전생처럼

 

 

내가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갔다

 

울고 싶지 않아서 입속을 허밍으로 채운 날들

매달릴 곳이 차라리 사람이면 좋겠다

더 나이 들기 전에

내 집을 갖고 싶고

갈수록 병과 부음과 가까워 그날의 표정이 생겼어

 

맨정신으로 할 수 없던 말을

취하지 않고도 할 수 있게 됐다는 말

혼잣말에 놀라 두리번거리는 일 늘고 있지만

사람들은 놀랍도록 다른 사람 얘기를

귀담지 않는다는 걸 알아챌 무렵

 

이토록 서서히 멀어질 듯

사라질 듯 다가오는 것이라면

나의 사인은 희망이라고 기록해야 마땅해

 

아는 얼굴인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이처럼

 

유리창마다

낯선 얼굴이 떠올랐다가 가라앉는다

 

-시집 <골목의 날씨> 에서

 

 


 

김정경 시인

경남 하동 출생.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 2013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 전북작가회의 회원. 현재 전주MBC 라디오 작가. 시집 <골목의 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