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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정웅 시인(서울) / 사회인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20.

김정웅 시인(서울) / 사회인

 

 

오늘 밤 나는 사람을 죽일 것이다

라고 쓰고, 십 년이 흘렀다 몇 명의 여자와

연애를 했고 그보다 많은 여자와

잠도 잤다 멀쩡하게

졸업을 하고 취직을 했다 누군가

과장님 하고 부르면 그럴듯하게

웃으며 돌아본다 다정한 삼촌이 되었고

주택부금도 붓는다 더 이상

정부를 원망하거나

강남에 사는 사람들을 증오하지 않는다

오늘 밤 나는 사람을 죽일 것이다

라고 쓰고, 강산이 변했다

시인이 되었고 시 쓰는 건 포기했다

첫사랑을 생각하며

수음을 하거나 아무리 취해도

벽을 후려갈기지 않는다 이제 나는

누군가의 번듯한 가족이며

직원이다 그러니깐 나는

오늘 밤 사람을 죽일 것이다

라고 쓰고 모든 게 완벽해졌다

까닭을 알 수 없는 살의를

온전히 길러 내는 내가

나를 죽이기 전까진

개미 새끼 하나 못 죽일 것이다

 

―계간 『시작』 (2013년 겨울호)

 

 


 

 

김정웅 시인(서울) / 멸족(滅)에 관한 서시

 

 

1

침을 묻혀 시집의 책장을 넘기는 것은

미리, 죽음에 혀끝을 대 보는 것이다 그래서

시를 읽는 자와 마주치면 서글프다

 

2

정신적인 암을 선고받은 자만이

시인이 될 수 있다 겨우 손바닥만 한 종이 위에

일생을 요약할 수 있는 시간은

유서를 쓸 때뿐이다, 말끝을 흐린 유언처럼

생은 한낮에도 갑자기 어두컴컴해졌다 그때마다

동종(同)의 선지자가 남긴 한 권의 유서를 읽으며

먼저 나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살아서

세상 그 어떤 고문(閉)으로도 열리지 않던 입이

그 순간만큼은 짐승의 사체처럼

아- 하고 벌어지는 것이었다

 

3

시를 읽는 족속에게

종족보존본능이란 고독이었다

스스로를 거세하고 남자도 여자도 아닌

한 마리 유령으로 살다가

시인과 사랑에 빠진 적이 있다. 매일 밤

물에 빠진 자의 허우적거림처럼

절망적이었던 섹스, 그러나

아침이면 기형의 추억을 사산하고

근친상간을 저지른 자가 강으로 가듯, 우리는

슬그머니 죽어 갈 뿐이었다

 

4

불치병 환자가

면도날을 챙겨 여행을 떠나듯, 가방 한구석에

시집을 숨기고 살았다 이미

유작처럼 쓸쓸해져 버린 여생, 이제는

하관을 하듯, 덜컹- 황혼이 내려앉는 곳에만 있다는

시인들의 무덤에 내가 술을 부어 줄 차례다

일족의 적멸, 그 연혁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바람의 곡(栗)을 구겨 삼킬 것이다.

 

 


 

 

김정웅 시인(서울) / 짐승스타일 1

 

 

강제로 벗겨진 옷가지처럼

구겨진 여자는 돌아누워 있다

척추를 따라 지퍼를 꽉 채운 등, 남자는

목덜미에 손을 넣어 꼬리뼈까지 지익-

발가벗은 그녀를 한 번 더

강제로 벗긴다, 아무리 목을 비틀어 봐도

봉제인형은 죽지 않아, 싸구려 솜뭉치 같은 슬픔이

방의 모든 구멍에서 튀어나온다, 이

시뻘겋고 물컹거리는 내막은

사람은 살아서 건널 수 없다는 사막, 혹은

짐승이 아니면 견딜 수 없다는

적막, 이리 와

내가 너의 고장 난 횡격막을 고쳐 줄게, 어미가

물에 빠져 죽은 아들의 입속에

숨을 불어넣듯 여자는 있는 힘 다해

생의 전부를 쥐어짠다 건드리기만 해도

빨갛게 부풀어 오르는 어둠의 점막, 그

서로의 가랑이에 얼굴을 끼우고

두 마리 짐승이 하나의 거대한 똬리를 트는 순간,

몸통을 관통한 출구 없는 터널 속에서, 드디어

우리는 만난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주검이 묻힌

지하로 실핏줄을 뻗는 시간(屍姦)의 시간(時間)

창밖에서는 개들이 짖기 시작한다 새벽이 올 때까지

사람들은 남김없이 마음을 물어뜯길 것이다

 

 


 

 

김정웅 시인(서울) / 저 죽은 새가 그대의 행복했던 시간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여름새의 뼈 위로

눈이 내린다, 아니다, 떠나지 못한 것은 새가 아니다

내내 여름인 고향이 새를 떠나고

구더기 떼처럼 들끓었던 타국의 여름이

새를 떠난 것이다. 살아서

평생 열을 앓았던 몸에서 하나의 계절이

떠나는 것을 본다 새의 텅 빈 두개골 속, 그

어둠을 모두 메워 버릴 듯 눈은 내리고

끝내 내 몸에 정착하지 못한 계절을 따라서

달아난 그 사람을 생각한다, 사랑하는 동안

내가 주었던 것은 체온 밖에 없었으므로, 나는

발목까지 쌓인 눈 속에서 발 없는 귀신이 된 것처럼

춥다, 얼어붙어도 흐르는 저 강처럼

자꾸 도망을 치던 그 여자를 끝내 건너지 못했다

유령이 되어서도 건너지 못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뿐이다, 흙탕물 일었던 그 여름의 강이

이 어둠 속에서, 눈발 속에서 다시

슬그머니 수위를 높인다. 이런 날에는

사람이 빠져 죽어도 세상은 눈치 채지 못한다

지난여름 내내 번성했던 추억들이

멸종하고 있다, 멸종된 동물들에 대한 도감(圖鑑)에서

이 장면을 본 것만 같아 슬프다, 내 생의

모든 페이지를 넘겨 버릴 듯 바람이 분다, 더 이상

채집할 추억은 없다는 듯, 그가 새의 두개골을 주머니에 넣고

발을 잃어버린 나를 이곳에 두고 간다

세상이 캄캄해진다, 이제는 그만

인생을 암전(暗轉)하고 싶다

 

 


 

김정웅 시인(서울)

1980년 서울에서 출생. 2007년 경기대학교 무역학과 졸업. 2009년 《시작》 신인상에 〈구멍에 관한 기억들〉 외 4편이 당선되어 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