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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희정 시인(양주) / 고리(古里) 외 10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21.

김희정 시인(양주) / 고리(古里)

 

 

탁, 허공이 켜지고

어느새 즐거운 공작 시간

 

소녀가 허공을 들고 집을 나섭니다

일렁이는 그림자 뒤로

가쁜 숨소리들이 꿈틀대며 끌려오고 있습니다

모래무덤 속

녹아내린 뼈들을 끄집어내자

챙 넓은 밀짚모자도 함께 딸려나옵니다

눌어붙은 불가사리 서너 마리

그을린 노을 두 뼘

철조망 저편에서 길어올린

폭사한 범고래의 노래 한 양동이

저런, 서둘러야겠습니다

무서운 밤이 또 몰려오고 있습니다

스패너구름과 망치바람과 드릴소나기

또 뭐가 필요하더라?

어서 한 폭의 저녁을 조립해

다시 세상에 걸어놔야 합니다

눈먼 소녀가 불룩한 허공을 들고

칠흑의 자정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흐물흐물 제 살이 흘러내리는 줄도 모르고

 

소녀의 공구 상자 속에서

여기는 아직, 즐거운 저녁입니다

 

 


 

 

김희정 시인(양주) / 전국보일러설비협회 지침

 

 

 보일러는 비 오는 밤에도 비가 오지 않는 밤에도 고장 날 수 있어요 전국보일러설비협회 지침에 따르면 제품 자체엔 하자가 없어요 문제는 보통 합선 때문에 발생하죠 사용자가 아무리 촉각을 곤두세워도 변덕스런 전류의 기분을 온전히 통제할 수는 없으니까요 누가 알겠어요 전류들이 서로를 뜨겁게 끌어안을지 서로의 뺨을 세차게 갈길지 그러니까 이건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에요 수리는 불가능해요 내부 회로가 다 타버렸으니 원하시면 새 보일러로 즉시 교체해드립니다 아아 그런 게 아니에요 고객님 어젯밤 자는 내내 이를 갈았다고요 꿈속에서 악어의 목을 졸랐다고요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꼭 그렇다고도 말씀드릴 수 없네요 전국보일러설비협회 지침에 따르면 저희 기사들은 그저 회로의 뒤엉킴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 밖의 것에 대해선 침묵해야 하죠 아니요 그런 게 아니구요 그저께는 자는 내내 가위에 눌렸다고요 아내가 목을 졸랐다고요 걱정 마세요 고객님 내일이면 새 보일러가 배달될 겁니다

 

이윽고 그들이 해체된 나를 연장가방 속에 구겨넣었다

 

 


 

 

김희정 시인(양주) / 페인트 모션

 

 

정직하다 페인트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구관조 부리를 색칠하니 털투성이 빨강이 튀어나온다 이럴 땐 거짓말 좀 해주었으면

보라색을 칠하니 새하얀 베개에 피멍이 든다 하얀색을 칠하니 피멍 든 베개가 다시 상냥해진다

도료는 충분하다 세상 전부를 칠할 만큼

분홍색 페인트통을 열자 분홍색 구두가 튀어나온다 분홍분홍 고무줄놀이를 한다

하늘색 페인트통을 열자 하늘색 넥타이가 튀어나온다 하늘하늘 구름의 목을 조른다

버려진 정원을 붓질하니 화사한 꽃밭이 피어난다 적요한 자정을 붓질하니 현란한 정오가 들어선다

이건 어떨까

그이의 무표정을 색칠한다 노랑 연두 다홍 파랑, 페인트 위에 페인트를 덧칠한다

파랑 다홍 연두 노랑, 눈 감고도 할 만큼 쉽다 보지 않아도 보인다 덜 마른 페인트 위로 명랑이

코팅되고 첫 키스의 추억이 흐르고 그이의 입술이 아름답게 벌어지고

공평하다 페인트는 누구에게나 거짓말한다

 

 


 

 

김희정 시인(양주) / 이중섭*

 

 

이봐, 점원 아가씨

지금 닦고 있는 서점 유리창

그 맑디맑은 눈알 좀 들여다볼까

길 건너 헌옷수거함

 

보여? 오랜만에 건진 원단 좋은 햇볕을 걸치고 트림하는

애꾸 아줌마 손바닥에서 유리눈알이 반짝, 윙크하잖아

아줌마가 눈알을 던지니까

보올, 구름이 글러브를 펼쳐 받아주잖아

솜털구름 묻히고 깔깔깔 뛰어다니는

저 하늘눈알 좀 봐

긁힌 다릴 풀밭에 문대고

이번엔 민들레눈알이 되잖아

보이는 건 뭐든 슬쩍하는 눈알을

 

조심해! 자작나무 등을 긁어주던

산들바람을 벌써 집어갔어

클로버들이 고쟁이 속에 숨겨둔

네 번째 이파리도 쏙 빼가고

터진 옆구리로 호각을 불던

아줌마 운동화까지 벗겨갔어

저기, 아줌마가 운동화눈알을 주워들잖아

비어 있는 안구 속에 몰래 집어넣잖아

 

오늘은,

아무도 운동화를 도둑맞지 않았어

다행이야 누구나 맨발이라는 거

 

* 이중섭은 1955년 연필로 그린 자화상에 붉은 색연필로 ‘ㅈㅜㅇㅅㅓㅂ’이라는 서명을 남겼다. 마치 유서를 남기듯. 그리고 이듬해 작고했다.

 

 


 

 

김희정 시인(양주) / 아버지는 빈 배낭처럼

 

 

 아버지가 또 오줌을 싼다. 배낭은 젖어버리고 내 손엔 뜬금없이 대걸레가 들린다. 아무리 머릴 감겨도 지린내가 나는 대걸레. 아무리 이를 닦아줘도 누런 대리석. 나는 오늘도 절룩절룩

 

 새벽, 아버지는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거짓말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CTV 몰래 아버지 안에 통조림을 집어넣는 나의 손놀림이 갈수록 결백해진다. 비바람에 두들겨 맞아 멍이 들어도 내 등에서 떨어지지 않는

 

 아버지는 빈 배낭처럼 배고프다.

 

 점심시간, 나 대신 밥을 먹는 벤치. 나 대신 참치통조림을 퍼먹는 보도블록. 조금만 굶어도 무거워지는 아버지를 둘러메고 나는 늘 피곤하다. 비틀대다 자꾸 발목을 삔다. 긴장하면 거품을 물고 쓰러진다.

 

 아침, 쇠파이프를 든 사내들이 아버지를 덮친다. 몸을 뒤틀기 시작한 아버지를 집 밖으로 끌고 나가 대걸레 빤 물을 끼얹는다. 담벼락이 쇠공에 맞아 쓰러지는 걸 넋 놓고 바라보는 아버지. 일자무식의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방울들. 깨진 보도를 눈 감고 뛰어다닌다. 절룩절룩. 다가오는 밤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

 

 나는 여전히 공원을 어슬렁거리고 있다.

 배낭 속 토파맥스*통이 속삭인다.

 조심해, 아버지가 언제 배낭에서 튀어나올지 몰라!

 

* 간질병 치료제

 

 


 

 

김희정 시인(양주) / 내 친구 방귀 고양이

 

 

뽕과 뿡 사이, 그가 걸어나온다

꼬리를 치켜들고 백지 위를 어슬렁대는

 

그를 보면 누구든

지붕 위로 기어오른 태양을 도시 뒷골목으로 다시 굴려버리거나

밤마다 창문 속에 갇혀 기출문제를 베끼는 고시생의 안경을 낚아채 초승달에 거는

그의 꼬리에서 아련한 몽상의 냄새를 맡게 되리라

 

섣불리 붙들려하지는 마시라

한 번 맛본 길은 결코 잊지 않는

그의 꼬리는 흰 털로 뒤덮인 사기접시였다가

구부러진 물음표였다가

순식간에 가시 돋친 장미로 활짝 펼쳐지기도 하므로

 

태어나자마자 달의 외과에서

부드러운 항문에 견고한 달빛을 이식받았으니

시도 때도 없이 몽상을 뀌어대는 그를

경계하시라 언제 어디서든

황홀한 냄새에 공격당할 수 있으니

 

그가 뽕, 하고 웃거나 뿡, 하고 울 때

 

엉덩이의 압제에 시달려온 방석이

마리화나를 피우기 시작했다고?

새벽안개의 은밀한 곳에서 아침의

발냄새가 흘러나왔다고?

 

자 이번엔 어떤 냄새가 날까

뿡과 뽕 사이, 샤프가 삐끗하고

나는 또 그의 순백색 꼬리를 놓치고야 마는 것인데

 

창밖으로 불쑥 얼굴 내미는 고시생

코를 쥐고 소리친다

여기 내 샤프에 안경 좀 씌워줄 사람!

 

 


 

 

김희정 시인(양주) / ​응답하라, 1997

 

 

짬뽕을 시켰는데 짜장면이 왔다

동료들과 웃으며 짜장면을 먹었다

짬뽕을 시켰는데 또 짜장면이 왔다

전화 코드를 슬며시 빼고 짜장면을 먹었다

짬뽕을 시켰는데 이번에도 짜장면이 왔다

어질어질 열려버린 바지 지퍼를 올리고 짜장면을 먹었다

짬뽕을 시켰는데 역시나 짜장면이 왔다

자꾸 밀려나오는 빈 서랍을 집어넣으며 짜장면을 먹었다

짬뽕을 시켰는데 아니나 다를까 짜장면이 왔다

허공에 붙들려 이리저리 휘청이다 짜장면을 먹었다

식구들에게는 사정을 말하지 않기로 하고

죽은 동료와

 

짜장면을 시켰다

짜장면이 왔다

 

 


 

 

김희정 시인(양주) / 주문*

 

 

얼마나 주문이 밀렸길래

상주를 이리 기다리게 한답니까

 

아비의 시신 벌써 부패해가는데

의로운 추모객들

나비떼처럼 저리 몰려와 있는데

 

좋습니다 시키는 대로

흙 묻은 신발 탈탈 털고 사무실로 들겠습니다

속옷까지 전부 벗겠습니다

헌데 욕조 속에 들어가라니요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맨몸으로

죄를 불리라니요 박박 밀라니요

 

알겠습니다 필요한 절차라면

세계의 첫울음처럼 순결해진 몸에 향유 바르고

손톱과 발톱 예쁘게 깎겠습니다

선반 위에 준비된

나비의 날개 속에 팔다리 집어넣겠습니다

헌데 입안 가득 날것의 참회를 채우라니요

고인의 양식을 훔치라니요

 

따르겠습니다 얼마나 주문이 밀렸으면

상주를 이리 기다리게 할까요

명주이불로 맨살 동여매고

미리 예약해둔

향기로운 관 속에 눕겠습니다

자 이제 무엇을 할까요

더 주문해주세요

 

쾅 쾅 우리의 관에 대못을 박는

숙련된 장례플래너,

당신은 누구신가요?

 

*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 「주문이 많은 요릿집」에서 발상을 얻음.

 

 


 

 

김희정 시인 / 계단을 속여라

 

 

 살고 싶은 시체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이 밤, 도대체 차를 몰고 어디로 간단 말이냐 그런 사내를 위해 가진 건 우울과 몽상뿐인 시인을 위해 파이프 연기가 대기를 휘젓는 달의 옥탑방 커피포트에서 갓 내린 불면이나 후후 들이켜겠다니 그의 검은 혀를 애무하다 연유처럼 풀어지겠다니 그게 말이나 된단 말이냐

 

 나는 발 벗고 나설 게다 말로 안 되면 몽둥이라도 들 테다

 

 죽고 싶은 귀신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이 밤, 어찌 나를 가로막는단 말이냐 철 지난 구름이나 읽어내리는 동공을 정성스레 닦아주겠다니 깃털이 삐죽 나온 겨드랑이에 두 팔 끼우고 함께 구름 위를 거닐겠다니 그게 말이나 된단 말이냐

 

 이불을 들추자 향긋한 커피 냄새가 흘러나온다 너는 진정 행복하단 말이냐 너를 구하러 가는 길

 

 발 디디는 곳마다 천 길 낭떠러지가 튀어오르는구나 톨게이트를 통과할 때마다 사나운 달빛이 달려드는구나 세상의 모든 길을 발설하는 지도를 펼쳐 들고 나는 지금 달의 반대편에 와 있다 계수나무에 걸터앉아 달의 환한 내부를 염탐하고 있다 한 손에는 코를 고는 불면을 들고

 

 길고양이들의 아홉 번째 영혼이 기일게 울며 월담을 일삼는 이 밤, 무엇이 좋다고 그리도 웃는 것이냐 이 철없는 것아 너의 무릎을 베고 낱장으로 흩어진 달빛을 스테이플러로 깁던 사내가 시나브로 엎질러지는 중인데 사내의 검은 혀가 허공을 흘러다니며 벌써 이 밤을 지우고 있는데 밀린 월세의 옥탑방도 사륵사륵 녹아 없어질 게다 서둘러라 어서 걸쇠를 풀려무나

 

 복면 쓴 새벽이 문 앞에 당도했단 말이다

 

 우리의 계단이 잠에서 깨어나고 있단 말이다

 

-웹진 『시인광장』 2015년 10월호 발표

 

 


 

 

김희정 시인(양주) / ​젠틀전선

 

 

안녕, 하며 올게

 

텅 빈 건조대 넘어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구겨지는가 싶어도

펼쳐지며

살랑살랑

드디어 여기로

육박

매순간 올게

그러니까 당분간은

추락한 티셔츠의 어깻죽지를 어루만지듯

활짝 펼쳐지는가 싶어도

구겨지며, 안녕

늘어진 안부로

지워진 보조개로

눅눅한 유머를 한껏 들이마시고

 

그러니까 당분간은 북상하고 있다

 

 


 

 

김희정 시인(양주) / ​편집자

 

 

새는 일요일마다 돌아왔다

제도용 가위를 입에 물고

 

콧수염을 떼어간 후임자는

상투적이야, 싹둑

변성기의 목젖을 노리는 수캐들은

불온해, 싹둑

연민하는 수집가 연상의 여인에게 한 움큼씩 쥐여 주던

어머니는 자정의 무수한 씨발년들은

싱거워, 싹둑

달빛에 부풀어 오른 항문은 그 위에 재를 뿌리는

새벽녘 호주머니들은

무서워, 싹둑

 

새야, 너는 무얼 먹고 그렇게 통통해졌니?

 

무성하게 자라난 원룸 안에서

실종자들이 핀볼게임을 하고 있다

 

 


 

김희정 시인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 명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현대문학 박사과정 수료. 2014년 《내일을여는작가》 신인상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