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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하 시인 / 수평선
언젠가 그와 나 사이에 선을 하나 그었다
그곳에 서로의 마음을 걸어두었다
얼마 후 돌아보니 선은 더 굵어져 있었다
그와 나의 닿지 않는 거리에서 쉬지 않고 뒤채는 상념
가까이 다가오던 빛은 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항상 그만큼의 거리에서 그와 나는 창이 되어 있었다
김완하 시인 / 새벽 신문을 펼치며
새벽어둠을 가르는 자전거 급브레이크 안마당으로 툭 하고 떨어지던 한국일보 아버지 주섬주섬 일어나서 어둠 속에서 신문을 건져 올리셨다 호롱불 앞에 바다처럼 펼치셨다
확 풍기는 기름 냄새가 코에 와 닿으면 어시장 생선처럼 튀어 오르던 활자 아버지 펼치신 신문 속 세상은 내게 멀고 아릿한 달빛 별빛 꿈결 속으로 나의 유년도 함께 달려갔다
중학생이 된 어느 날, 신문이 눈에 들어오고 시가 다가왔다 내가 먹고 자랄 꿈이 거기 돋아나 있었다 신문 한편에 실려 오는 시를 읽으며 가슴이 마구 뛰었다
이제 아버지 떠나신 빈자리 시가 내게 남았다
김완하 시인 / 눈발
내장산 밤바람 속에서 눈발에 취해 冬木과 뒤엉켰다 뚝뚝 길을 끊으며 퍼붓는 눈발에 내가 묻히겠느냐 산이여, 네가 묻히겠느냐 수억의 눈발로도 가슴을 채우지 못하거니 빈 가슴에 봄을 껴안고 내가 간다 서래봉 한 자락 겨울바람 속에 커다란 분노를 풀어놓아 온 산을 떼 호랑이 소리로 울고 가는데 눈발은 산을 지우고 산을 지고 어둠 속에 내가 섰다 몇 줌 불꽃은 산모롱이마다 피어나고 나무들은 눈발에 몸을 삼켜 허연 배를 싱싱하게 드러내었지 나이테가 탄탄히 감기고 있었지 흩뿌리던 눈발에 불끈 솟은 바위 어깨에 눈 받으며 오랜 동안 홀로 들으니 산은 그 품안에 빈 들을 끌어 이 세상 가장 먼데서 길은 마을에 닿는다 살아 있는 것들이 하나로 잇닿는 순간 숨쉬는 것들은 이 밤내 잠들지 못한다 맑은 물줄기 산을 가르고 모퉁이에서 달려온 빛살이 내 가슴에 뜨겁게 뜨겁게 박힌다 내장산 숨결 한 자락으로 눈발 속을 간다
김완하 시인 / 계림(桂林)에 가서 -요산(堯山)에 올라
계림에 가서 요산에 올랐다 일행의 의견이 분분하여 반은 오르고 또 반은 차에 앉아 시내를 돈다고 했다 나는 남아 삭도(索道)를 타고 올랐다 허공에 매달려 내려보는 요산은 평범한 구릉이라고나 할까 요산은 계림의 빼어난 산들과 달리 밋밋하고 둥글둥글했다 다만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주변 산들이 그곳이 산속임을 알게 했다 산은 때로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다른 산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서 필요한 때가 있기 마련이지 사방 주변의 산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봅슬레이를 타고 내려왔다 굳이 나 또한 그 산에 대해 말하려 하지 않은 것은 요산을 베일 속에 묻어두기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으나, 밑에 남아 있던 사람들 모두 그 산에 대하여 알려 하지 않았다 이상하리만치 누구도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산은 그들의 가슴속에 솟아 있다는 것일까 그들과 나 사이에 요산은 다시 수천 개의 형상으로 솟아나고 있었다 요산의 주변으로 멀리 우쭉우쭉 솟은 산들이 뭉개지며 노을 속에 몸을 비우고 있었다 그렇다면, 요산은 그들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것 요산은 계림에 없다 내가 본 것은 안개 속에 가려진 산의 그림자.
김완하 시인 / 섬
바닥이 깊다는 것, 물 빠진 뒤에야 알았습니다
드러난 갯벌에 서서 사방 팔방 흩어지는 게떼 속에서 다시 차오를 깊이를 봅니다 그 물의 무게를 느낍니다
물 나간 뒤 빈 바닥 위에서 두 섬도 하나임을 알았습니다
김완하 시인 / 허공에 매달려보다
곶감 먹다가 허공을 생각한다 우리 일생의 한 자락도 이렇게 달콤한 육질로 남을 수 있을까 얼었다 풀리는 시간만큼 몸은 달고 기다려온 만큼 빛깔 이리 고운 것인가
맨몸으로 빈 가지에 낭창거리더니, 단단하고 떫은 시간의 비탈 벗어나 누군가의 손길에 이끌려 또다시 허공에 몸을 다는 시간
너를 위한 나의 기다림도 이와 같이 익어갈 수 없는 것일까 내가 너에게 건네는 말들도 이처럼 고운 빛깔일 수 없는 것일까
곶감 먹다가 허공을 바라본다 공중에 나를 매달아본다. 보이지 않는 힘으로 감싸는 빈 손 내 몸 말랑말랑 달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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