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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기원 시인 / 미궁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26.

박기원 시인 / 미궁

 

 

젖몸살을 앓는 여름

 

돈을 쫒아 살아가는 허풍이 전부인 이상주의자

청년들을 어둡고 습한 미로에 떨군다

살아남으려 미첨에 리액션이

몸에 배어버린 청년들의 박수에서 아픈 소리가 난다

 

아첨과 날을 세운

저체온의 얼음들 어둠과 싸우다 잠이 든다

새가 되어 날아가는 꿈을 꾼다

 

손톱 세운 규범을 지키려니 어휘는 갇혀있고 움껴진 주먹에 분노가 흐른다

화난 뾰루지 속에 응석받이가 갇혀 있다

 

모르는 사이 그늘이 자라고 웃음이 공기에 희석된다

턱을 괸 자세가 저녁을 끌고 아침으로 건너간다

 

뇌로 몰린 허기에

눈으로 걸어간 길목이 저택으로 들어간다

 

 


 

 

박기원 시인 / 102동에 사는 마리오네트

 

 

다치지 않은 척하고 돌아오는 날이 많을수록

안고 자도 허전한 그림자

돌아오지 않는 사람보다 더 바짝 끌어안을수록

나는 내가 안으로 부식된다

 

나보다 못한 나의 절반을 데리고 사는 나에게

절반보다 나은 게 없는 절반으로 살아가는 나에게

부탁도 거절도 여전히 나는 내가 어렵다

 

베란다에서 떨어져 죽은 적 있는 절반은

대리기사가 건넨 어둠을 거스름으로 쥐고

발밑에 새까맣게 쓰러져있는 102동의

계단을 분리하지 않고 수거함에 버리는 게 일이다

 

센서 등燈이 잃어버린 파티처럼 깜빡이면

몸을 뛰쳐나갔다 다시 나를 파고드는 나

그 이식이 너무 저릿한 나머지

발소리를 정복한 고양이의 영역에 마려운 독백을 지린다

 

밤마다 버려지는 아파트와

그림자의 뼈가 부러지고 있는 아이들

밤마다 버리고 싶은 꼬리 없는 나와 꼬리치는 나

 

가장 낮은 곳이 언제나 가장 높은 곳이었듯

나는 멀리 있는 나보다 더 깊은 나를 멀리하고 있다

 

달빛에서 뛰어내린 고양이의 척추를 본 사람은

살아온 보폭과 살아갈 걸음수가 닮은 또 다른 나

그리고 어른들이 불러들이고 남은 아이들뿐이다

 

떨어질 때, 꿈을 꼬집어서 살아 돌아온 아이가

꿈자리를 털어내고 있는지 작은 창이 잠시 아른댄다

 

나의 흉터는 뛰어내릴 때 다친 것들이 아니라

나에게서 내가 달아날 때 다친 것들이다

 


 

박기원 시인 / 가장의 동선

 

입을 다문 채 길게 늘어선 줄이 허청거린다

뒤늦은 정보로 몸을 끝줄에 놓고

한나절 알리바이를 만들었다

산통이 빨갛게 기록되고부터

맨몸으로 코로나와 맞짱을 뜬다

접힌 사연들은 뉴스가 후미진 곳까지

이참에 줄줄이 꺼내어 따져 볼 모양이다

여름의 열기는 창문이 물고 있고

바이러스는 엇 먹은 문틈을 기웃거린다

격리된 시간은 침묵이 밀려오고

침대는 너무 커서 고향의 골목들이

드나들곤 한다

일부러 오지 말아라, 난리다

노모의 걱정은 알람처럼 태만을 깨웠다

​-무크 연간 『동대문문화』 2022년 발표

 

 


 

 

​박기원 시인 / 무개성 사회집단

 

비가 오네요

친구는 세 개의 문을 통과하는 높고 아슬한

갇히면 나오기 꺼려지는 집에 살아요

 

깎아지른 벽 날에 잘려 나간 말들이 되돌아오지 않는

끼니에 온몸을 힘껏 건 가장들이 빗방울처럼 스산하게 흘러내리는 건물에 살아요

 

습한 속옷과 코트사이에 갈등이 일면 주머니를 뒤져요

백 원짜리동전이 집게손가락에 닿으면 허기지듯 온몸에 갈증이 번져요

어깨가 무거워지고 그늘이 거뭇하게 드리워지면

옆집 삶이 궁금해지기 시작해요

 

각진 벽 곳곳 살갗이 벗겨지고 먼지가 앉기 시작할 때 벽에 기댄 사람들은 무거운 추를 매달은 하루에 보채 견디지 못하고 빗방울처럼 흘러내려요

 

공허해지면 버릇처럼 공원에 나가 구부정한 자세로 얼음이 되어 몇몇 앉아 숨을 쉬어요

비밀번호를 까먹은

친구는 동창회에 나오지 않아요

​​

-격월간 『시와수사상문학』 2024년 봄*여름호 발표

 


 

박기원 시인

경남 진주 출생. 2014년 <경남문학> 신인상 수상. 2018년 《지필문학》으로 시부문 등단. 시와수사상문학 홍보위원장. 현재 부산디카시인협회 부회장. 시집 <마리오네트가 사는 102동> <마추픽추에서 온 엽서> <바람풍선의 수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