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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주현 시인 / 화살표의 속도는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29.

황주현 시인 / 화살표의 속도는

 

 

 걷고 달리고 날아가는 속도다 화살표는 정지해 있으면서도 계속 이동 중이지만 뒷걸음질 치는 기능이 없다

 

 화살표에서는 왜 짐승의 울음소리가 날까

 

 궤적에서 공격성이 자란다 사활을 건 뾰족한 모양이 머리인지 입인지 코인 지 궁금해 한 적 없지만 그것이 가끔 말을 하거나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기도 한다

 

 화살표는 계속 어디론가로 날아가고 도망가고 사라지려 한다 몇몇 동물들은 그런 화살표와 비슷한 외모를 노력 끝에 얻었지만 지금은 멸종의 위기에 처해 있다

 

 화살표를 발명한 사람들

 혹은 진자운동처럼 0과 0 사이에서 태어나고

 그 사이를 무한 반복한다

 

 꼬리에 두느냐 머리에 두느냐를 고민하는 동안은 이미 한참이나 날아 온 거리다 어떤 사람에게선 이미 녹이 즐거나 그 끝이 뭉툭해진 화살표가 무더기로 발견되고 또 어떤 사람에겐 마치 새싹처럼 이제 막 돋는 일도 있다

 

 빗나가는 과녁을 가진 것들도 많겠지만

 명중이라는 끝을 두고 있다

 공중에 초록을 박아 넣고 이리저리 여진을 앓고 있는

 저것들, 혹은 그것들

 

 지금도 화살표를 가로 막거나 되돌려 놓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는 단체가 있를지도 모른다    화살표를 조종하는 또 다른 화살표를 개발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지만

 

 여전히 화살처럼 관통하는 날이다

 

-2024년 경남도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황주현 시인 / 경북선 물소리 배차 시간표

 

 

물소리에도 정각이 있습니다

 

정오의 햇살은 물 도리에서 가끔

물의 보폭을 맞추느라 연착할 때 있습니다

온갖 지류에서 탑승한 물 색깔들은

쉼 없이 덜컹거립니다

 

덜컹거린다는 것,

그건 물이 달린다는 뜻입니다

속도를 조절하는 물의 바퀴가 있다는 뜻입니다

 

샛강 속도로 달리는

이 완행, 그래서 늘 적자랍니다

 

때론 어느 집 마당 옆을 민망하게 지나치기도 하고

군불을 때는 저녁연기나

애호박 달린 호박 줄기와 잠깐

그 속도를 다투기도 하지만

완행은 저의 소리를 세면서 달립니다

 

한때는 나름 근사치의 시계 역할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완행이 지나가면 마을은 아침상을 차리기도 하고

저녁상을 물리기도 했었습니다

학교 종소리보다 먼저 아이들을

운동장으로 부르곤 했었습니다

 

용궁역 지나 큰 바위에 직선을 양보하고

옥산역 비탈진 경사면에 주춤거리다 보면

완행은 물소리 가변을 얻어 달리는 것입니다

영주 소백산에서 김천 황악산 사이,

더디고 질기게 무궁화꽃이 피었다 집니다

 

물이 흐르다 착해지면

둥글게 소를 이루어 논밭을 거느리듯

완행도 달리다 잠깐 멈추는 곳이

바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저녁 무렵의 노을빛을 가득 담고

두근거리는 붉은 차창들,

텅 빈 만석으로 흑자를 찍는 순간입니다

 

힘겹게 산을 오르고 또 넘고

철교를 타고 물을 건너는 완행,

무궁화꽃 벙그는 속도로

가만히 들어보면 물소리에도 한때는

삐딱하게 베레모를 쓰고 푸른 물빛 단복을 입은

차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등역이나 고평역을 지날 때는

습관적으로 속도를 줄입니다

내성천에서 잔업을 마친 바람의 뭉치들이

물때를 놓치지 않고 슬쩍, 무임 승차합니다

잠시 덜컹, 저녁의 짐들이 밥 냄새 그리운

집 쪽으로 우르르 쏠립니다

 

물소리 배차 시간표엔

잠깐의 연착이 표시됩니다

 

-제1회 경상북도 문예현상공모전 최우수상

 

 


 

 

 

황주현 시인 / 체중계

 

정점은 어딜까

요동치는 바늘의 지점을 지난

잠시의 고요

그건 여전히 나에겐

분란의 여진들이 남았다는 증거다

나도 모르는 나의 여분을

저 바늘은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나라는 무게는 어디까지가 나의 것일까

미처 빠져 나가지 못한 조금 전의 감정까지 출렁거린다는 건

나의 영점을 감지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가늘고 예민한 끝에

여전히 도달하지 못했다는 뜻일까

부재중인 빈집의 한낮

미끄러운 장판위의 적막에

창문을 뚫고 먼지를 묻혀 들어 온 햇살이 흔들리며

정오의 무게를 깊숙한 사선으로 재고 가면

우람한 나무도 저의 무게를 재는지

가지 끝에서 쏟아져 나온 그늘이 바르르

바닥에서 떨다 가곤 한다

저의 그늘이 저의 무게를 알려 주는 것이다

더러 내 것이면서 내 것이 아닌 것들로부터

나의 무게를 의심한 적 있다

바람의 눈금을 밀고 들어가 들썩이며 숲의 무게를 재듯이

적어도 저 납작한 저울 안에

각자 무게가 다른 여러 명의 내가

휘청휘청 들어 있다

어제의 무게와 오늘의 무게가 다르다면

어제가 오늘에게 혹은, 오늘이 어제에게 의탁중인 것이다

오로지 눈금 하나의 평정심으로

그 열길 물속 같은 속내까지 눈치 챈 듯

오늘의 바늘 끝이 내리는 한 말씀

얼른 가서 밥 먹어라!

-계간 『백조』 2023년 봄호 발표

 

 


 

 

황주현 시인 / 반쪽을 보는 일

​​

 반쪽을 보는 일은 너무 밝지 않아서 좋다 오히려 겉은 흐릿하고 안쪽들이 더듬더듬 불들을 켜고 밝아지려는 그것이 좋다 반쪽을 남겨 두는 일은 나를 숨겨두는 일 같아서 좋다

 눈을 지그시 반 틈만 열고 반을 확인하는 순간

 가슴을 쓸어내리던 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절반도 모르는데 마치 다 아는 것처럼 말하던 사람들은

 끝까지 반을 열지 않는다

 궁금해도 닫아 놓고 있다

 

 당신을 반쯤 열린 나의 출구이거나 입구라고 여기던 날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당신을 통과해 여기까지 왔다 이만큼 왔으니 또 그만큼은 가야 한다고 말해서 또 좋다

 

 반쪽을 생각하면

 꼭 적도의 날씨를 떠올리는 일 같아서

 그곳의 사람들이 쓰고 다니는 모자 같아서

 

 가보지 않은 반쪽은 사실 그 어디에도 없다고 당신이 내게 말해서 좋다

​​

-계간 『문예』 2024년 여름호 발표

​​

 


 

 

황주현 시인 / 홀씨

​​

 

바람이 홀씨를 이리저리 얼러다가

앞마당 화단에 사뿐히 내려놓습니다

지나가던 해거름이 멈추자

홀씨 안에서 졸고 있던 수많은 손들이

일제히 눈을 가립니다

 

홀씨의 몸속

어느 한 생의 DNA가

뿌리를 찾아 먼 길 떠나기 전

하룻밤 노숙할 모양입니다

 

우리도 몸 누일 곳 찾아

바람과 햇살의 행간을 살피며

주섬주섬 짐을 싸고 부리며

어디를 떠돌다

여기에 내려앉았을까요

 

해그늘이 끌고 가는 저녁나절

홀씨의 하룻밤을 지키려고

눌러 앉았던 바람도 슬쩍

자리를 비켜 줍니다

 

풀 위에 걸터앉은 홀씨가

누울 자리를 만드는지

한참을 뒤뚱거립니다

 

이슬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노을마저

오늘은 경건하게 붉습니다


황주현 시인 / 행렬

정조로 왕복 2차선 도로를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차가 굴러간다

네 개의 바퀴가

할머니의 보폭을 맞추느라 중립으로 가고 있다

폐지는 이미 적재물 초과다

 

지나치는 택시가 서행으로 비켜가고

버스는 안전거리 미확보 간격으로 뒤따른다

버스 뒤에 트럭이

트럭 뒤에 봉고차가

봉고차 뒤에 더 답답한 택시가

줄줄이 꽁무니를 잇는다

 

할머니의 남은 생에

더 이상 좌회전 우회전은 없는 걸까

온몸이 비상등 깜빡이다

둥글게 말려 있는 몸은

급한 놈은 돌아서 가시라는 팻말 같은

 

더딘 걸음 뒤로 저녁도 어둑어둑 뒤따르고

할머니의 하늘빛 그림자가

중앙선을 침범하여 수시로 꺽인다

 

묵직한 한 생은

다행히 네 발 달린 믿을 놈 하나에 의지해

거룩한 행렬 맨 앞자리를 꿰차고

더 낮은 오체투지로 걸어가고 있다

 

 


 

 

황주현 시인 / 너에게 가는 길

 

너에게 가는 길은 너무 아득해

너의 거리엔 햇살이 넘실대고

바람이 찰랑이고

꽃과 나비가 빈틈을 채워 흔들리고

가다가다 맞닥뜨린 고요가

거기쯤에서 널 멈추게 하네

 

덜 깊은 고요가

너의 손을 잡으러 가는 지금

뒤돌아 가라고

적막이 깊은 뒤란을 다 채우기 전에

뒤돌아 가라고

이 고요의 한복판에서

내일 새벽달을 슬쩍 밀어 넣는

부끄럽지 않을 아침을 생각해서

뒤돌아 가라고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이 고요가 너무 아득하고

그 옛날, 부끄러워도 좋을 아침을 맞으러

저녁 이슬을 온몸으로 받아 내던 그때는

고요가 고요를 부르면 아무도 모르게

고요를 허물어뜨렸네

 

지금 그대와 나의 고요는

하늘의 별만큼 푸르러

손 한번 잡으러 가는 길은 너무 푸르러

차마 아침이 부끄러울까 봐

갈까 말까를 고심하는데

생의 반을 써버렸네

 

너에게 가는 길은 그토록 짧았는데

뒤돌아 오는 길은

지금도 끝이 없는 길이네

-2020년 <시인시대> 등단시

 

 


 

황주현 시인

1966년 경북 안동 출생. 경기도 수원시 거주. <예술세계> 작품 활동. 2020년 <시인시대> 등단. 2024년 <경상일보>, <경남도민신문> 신춘문예 당선. 화성문인 협회, (덤)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