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명옥 시인(부산) / 타로, 절제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29.

김명옥 시인(부산) / 타로, 절제

 

 

산등성이에 앉아 구름 샌드위치를 먹어요

부드러운 맛인가 하면 어느새 세찬 비가 파고들어요

흐르는 시냇물에 슬쩍 한쪽 발을 넣어보아요

아직 물살은 냉정해요

협곡을 지나 무사히 정상에 도달할 수 있을지요

점점 훈풍 불어오면 온기가 퍼질 거예요

욕망과 윤리의 시소는 어디로 기울어질까요

노천카페 앞 둥근 파라솔의 균형을 맞추어요

오른쪽에 담긴 물을 왼쪽으로 옮기며 온도를 조절해요

수호천사 미카엘이 날개 펼치고

너와 나를 화해시키려 해요

조절되지 않는 분노의 꼭짓점에서 미끄러져 내려와요

뒤집히려는 나를 붙잡아줘요

그림 속 아이리스에 앉은 나비가 날갯짓하고 있어요

오랫동안 경청만 하다가

영원히 마이크를 놓칠지도 몰라요

어제와 타협한 오늘이 고요를 가장한 채

삐딱한 사람들 심장을 어루만지고 있어요

 

 


 

 

김명옥 시인(부산) / 킥보드는 당신을 버리고

 

 

아파트 정원으로 킥보드가 쓰러져 있다

붉은 영산홍의 가쁜 숨결 받아쓰던

긴장한 초록 이파리들이 수런거린다

룰루랄라 양탄자 타고 멀리 날아오르는

아직 스며든 즐거움이 빠져나가지 못한 듯

바퀴는 허공에서 뱅뱅 돌아가는데

어디로 달려가는지 모르는 채

씽씽 달리던 일상의 바퀴는 제동이 걸렸다

보고 싶은 사람과 만남은 자꾸 미루어지고

세월이 지나간 몸의 흠집을 닦아내느라

방을 점령한 개미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마트를 가려고 길을 걷다가

꽃댕강나무를 덮친 노란 킥보드에 놀란다

번지던 아스라한 향기는 사방으로 꽉 막히고

앞서가던 시각장애인이 걸려 넘어진다

킥보드는 당신을 버리고 떠났는데

지그시 억누른 슬픔이 바퀴를 서서히 굴린다

즐거움이 언젠가 당신을 버리듯

견디다 보면 슬픔도 당신을 버린다

휘청거리는 내게 따뜻한 위로가 도착할까

지나간 자리마다 별을 심으며

일상의 바퀴를 서서히 돌리자

태양의 손끝마다 꽃들은 화들짝 피어나고

누군가 사뿐히 평온의 구역으로 착지한다

 

 


 

 

김명옥 시인(부산) / 이별 언저리

 

 

오래전 당신의 한 귀퉁이를 접어두었다

갤러리 추상화처럼 미묘한

감태 부스러기 흩어지듯 아슬한 모래성

따뜻한 손이 그리운 속앓이는 꽤 깊었다

 

오랜 친구인 국어사전과 헤어질 마음 먹고도

자주 접어둔 기억이 떠올라 망설였다

공중, 허공, 창공을 떠돌다

고요, 적막, 정적, 적요의 차별성을 묻곤 했다

 

처음엔 그 친구의 낯선 말을 필사하다가

얼마 못 가 그만두고 말았다

필요하면 만질 수 있고 접어둘 수 있으니까

 

괴물이 성큼성큼 걸어와

건물을 무너뜨리기 시작한다

먼지 앉고 손때 묻은

정겨운 집들이 아수라장이 된다

 

묵직한 문학지가 전자책으로 변신한단다

해독력이 떨어지고 눈은 침침해 오는데

이제 더 이상 접을 수 없나요

시대에 순응하는 훌륭한 기획

정녕 접을 수 없나요

 

 


 

 

김명옥 시인(부산) / 램프 증후군

 

 

 종아리에 쥐가 사나봐요 수시로 새벽되면 나타나요 나무토막처럼 마음도 뻣뻣해져요 검색창을 두드려요 하지정맥류라는 병원 광고가 튀어나왔어요 또 마취를 해야 하나요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나를 지켜봐야 하나요 약국 유리문은 마그네슘을 내미네요 순환이 되지 않으면 물구나무서기를 할까요 물이 부족하니 컵이 바쁠 수 있겠어요 낮에는 잘 보이지 않아요 탄자니아 하자베족을 불러 사냥을 부탁해야겠어요 그냥 아파트정원을 돌아다니는 얼룩고양이를 부를까요 소문이 나면 사람들이 연락을 안할 지도 몰라요 난처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을 거니까요 조마조마한 밤을 덮고 누웠어요 침대가 수술실 복도를 지나네요 조그만 쥐 한 마리 쪼르르 달려가네요 형광등이 흔들려요 검은 마우스가 화면 속 초록숲으로 사라졌어요

 

 


 

 

김명옥 시인(부산) / 질주의 중심

 

 

그가 한뎃잠을 잔다

아파트 단지를 산책하던 중

멈칫 발걸음을 멈춘다

 

벤치 위에 길게 누운 남자

아차, 하는 순간 죽음의 방패인 헬멧 벗어두고

사막의 열기나 쏟아지는 폭우에도

미로 같은 세상 헤쳐나가던 오토바이는 잠시 휴식 중이다

반쯤 열린 손아귀 속 목줄인 휴대폰도 졸고 있다

 

새들도 대화를 멈추고 나뭇가지 흔들며

포르르 날아오른다

싱그런 초록 노래 무한히 흘러나오는 아늑한 그늘 아래

그는 스스로 단잠을 주문하고 배달 중이다

 

부릉부릉, 고단한 일상을 끌고

당신의 환한 표정을 향해

그가 요란스런 삶의 바퀴를 닦으며

천천히 질주의 중심으로 굴러 들어간다

 

 


 

 

김명옥 시인(부산) / 붉은머리오목눈이의 편지

 

 

 평온한 일상은 깨어졌어. 노랑부리저어새의 출현으로 겨울철 쥐똥나무 열매처럼 나는 쪼그라들었지. 긴 주걱 모양의 부리 끝 노란색이 반짝이고 뒷덜미엔 갈기 장식을 단 채 한쪽 발로 서 있는 모습은 압권이었어. 손가락 한 뼘도 안 되는 내 몸집은 무성한 나뭇잎에 가려서 잘 보이지도 않지. 이 숲은 적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어. 언제 누룩뱀이 소중한 보금자리를 삼킬지 몰라. 오, 나의 새끼들이여, 희망이여, 얄미운 뻐꾸기가 탁란을 한 채 사라진 날의 아득함이여, 내가 말문을 닫자 숲은 적막 속으로 빠져버렸어. 숲의 요정이 우울한 표정의 나를 찾아왔어. 넌, 이 숲의 배경음악이야. 힘을 내! 어머, 깜빡 잊었네. 내가 이 숲을 지키는 텃새라는 걸……그래, 노랑부리저어새야 잘 지내다 가렴. 여러분 제가 보고 싶으면 여기로 놀러 오세요. 새들의 낙원 을숙도를 찾아오세요. 철 따라 손님은 바뀌지만 저 뱁새는 언제까지나 기다릴게요. 안녕.

 

 


 

김명옥 시인(부산)

1959년 부산 출생. 부산대 교육대학원 국어교육 전공. 1995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지금 삐삐가 운다』, 『달콤한 방』, 『프라이팬 길들이기』. 부산시인협회회원. 금정문인협회이사. 부산문학상우수상 수상. 부산대 교육행정직 공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