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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옥 시인(怡井) / 남편
접으면 지팡이 펴면 우산 오르막길 빗길에선 손에 꼭 쥐고 걷다가 비 그친 평지 산들바람 알짱거리면 시답잖은 애물 버렸으면 누굴 줬으면 했다가도 함께한 시간이 얼만데 받아낸 빗물이 샛강 하나는 되지 싶어 다잡아 다시 쥐는 오래된 우산 하나
김명옥 시인(怡井) / 봄 볕
갓 반죽한 그리움을 굽다가 하얗게 태웠다
네게로 쏠리는 생각을 뒤집지 못했다
냉이 꽃에 걸터앉은 마음이 까맣게 구겨졌다
-시집 <블루음계>에서
김명옥 시인(怡井) / 쑥
기댈 데가 바닥뿐이어서 바닥을 쓸어안고 바닥에 입 맞추며 산다 쪽방촌,막다른 골목에서 광장까지 꾸역꾸역 없는 길을 내며 개돼지에 짓밟혀도 오체투지 몸 던져 목숨의 바닥만은 푸르게 지켜낸다 깃발 꽂았다고 함부로 삽질 하지 마라 세상 돌아가는 꼴이 아니다 싶으면 단숨에 우우 일어나 휘황한 제후의 뜰도 일순 쑥대밭으로 만들고 말 테니
김명옥 시인(怡井) / 쥐똥나무에게 묻다
쥐똥나무꽃 향기가 장엄하게 언덕을 뒤덮는다 밀도 높은 향기 순식간에 콧속으로 잠입 가슴을 점령한 후 무방비로 놓인 손목 찾아 덜컥 수갑 채운다 그 몽롱한 향기의 오라에 묶여 표류하다가 무사히 네게로 닿으려면 오디세우스의 선원들처럼 쥐똥나무가 걸음을 멈춘 곳까지 밀랍으로 후각을 차단해야 하리 그러나 그러기엔 너무 늦었다 쥐똥나무꽃 향기는 이미 안으로만 집중하던 자아를 밖으로 확장하는 중이다 해서 쥐똥나무에게 출신지가 어딘지 열매가 있는지 없는지 뿌리가 쓴지 단지 묻는 대신에 향기의 깊은 안쪽에 대하여 향기의 결과 결 사이를 누비는 환(幻)에 대해서 언덕을 떠나지 못하는 칼날 같은 그리움에 대해서만 묻기로 한다
김명옥 시인(怡井) / 집
싸다와 지리다 사이에 문이 몇 개나 있는지 문고리를 잡은 손이 울상인지 아닌지 밀어야 하는지 당겨야 하는지 묻고 싶을 때 발밑을 뒤져봐 일상의 괄약근에 고무줄이 빠진 송탄 이모 지난밤에 또 보따리를 올망졸망 싸놓고 뭔 집에를 가야 한다고 당장 간다고 생떼를 썼다는데 봇짐 새로 삐져나온 속곳 가랑이 뭐가 마려운지 방바닥을 쥐었다 폈다 했다는데 날깃한 막바지까지 오십 년도 넘게 살아온 제집이 왜 집이 아닌지 망각의 입구 울울한 탱자나무 아래 쭈그리고 앉아 낯선 풍경만 무더기로 싸는 그녀 점점 무너져 지붕은 지붕대로 벽은 벽대로 오랜 몸을 버리고 풀의 집으로 풀-푸울 애맨소리 지리며 걸어 갈 모양인데 이 지경을 두 글자로 요약해 쓰라는 요양원 입원 서류 앞에서 코 빠뜨리고 서 있는 딸년들 대체 이게 말이나 되는 거냐고
김명옥 시인(怡井) / 정배리의 봄
추녀끝에 매달린 풍경 두엇 늦잠 든 바람 흔들어 달그랑 달그랑
부스러기 어둠 털어내고 울 너머 어깨 처진 목련 곁가지 사뿐 들어 돋을볕 쉬어 갈 자리 마련하라고
하얗게 하얗게 맴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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