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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만 시인 / 진짜 여름
바나나 꼭지를 은박지로 감쌌다 은빛이 물고 있는 건 열대의 계절 계속 싱싱해지라는 주문을 걸어본다
개수대에서 물기도 없이 탑을 쌓은 그릇들은 기단부터 말라갔다 TV에서는 선거 유세장에 모인 사람들을 보여주고 한낮의 기온은 슬그머니 꼭대기로 치달았다
비키니를 입은 마네킹의 구릿빛 피부들 올해가 가장 더울 거라는 예보에 여름 가맹점은 여름을 파느라 골몰하고 있다
아직은 참을만한 여름. 바람이 불면 그럭저럭한 여름. 이름만으로도 무시무시해서 충분하다는 여름. 여름은, 진짜라는 말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다
감싼 은박지를 벗길 때도 사람들은 서로 다른 여름을 불러댔다 웃으면서 손을 흔들거나 지난 장마에 언덕에서 죽어간 킬 힐을 추모하거나
여름아? 넌 너를 다르게 부르는 이름을 생각해 본 적 있니?
은박지를 만드는 공장이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동안 하나둘 은빛 모자를 쓰는 사람들 모두가 얼굴을 가린 채 낄낄거렸다 명찰에 새긴 이름이 썩지 않아서 쨍쨍해진, 진짜 여름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는 아버지처럼 저마다 킬 힐의 부활을 믿는 우리는
오늘도 싱싱하기 위해 날마다 언덕을 오르고 -웹진 『시인광장』 2025년 6월호 발표
최형만 시인 / 오래된 감정이라는 거
감정은 구겨진 몸처럼 오래 사는 거였다
그러니까, 바삭거리는 소리는 지난 기억이 길을 내는 소립니다 그늘진 곳에 어쩌다 빛이 드는 건 계절이 가는 길목에서도 잊지 말아 달라는 뜻이죠 빛이 다녀간 자리에 바람 불어 봄이 오는 것처럼
꽃나무 다시 만발할 때면 갈라진 잎맥을 놓치기 일쑤거든요 새들이 떠난 둥지의 빈 시간처럼
허공에 어둠을 담아본 사람은 압니다 바람이 무성한 잎을 함부로 핥는 동안 가지는 자꾸만 기울었겠죠 주름진 옹이는 모른 척했을 테고요 흔들리는 생에 열매를 맺는 일은 꾸역꾸역 채워간 하루치 울음 같은 것
분질러진 속내로 오래 사는 일인데요 내막을 알고서야 깊어가는 말이죠
하모니카 소리 불어오는 둥근 저녁 같은 날이었어요 빛을 털어낸 별똥별이 사선을 긋는 밤 마음이 무더기로 떠나는 날엔 눈을 감아도 세상은 붉을 텐데요 아마도 그건, 가도 가도 몰랐던 길을 이제는 알겠다는 겁니다 시간은 녹처럼 부서지는데 어쩜 해마다 봄은 다시 오는지
그러니까, 오래된 감정은 저문 날의 당신을 잊지 않겠다는 겁니다 -웹진 『시인광장』 2025년 5월호 발표
최형만 시인 / 그림자에 색칠하기
놀이동산의 컬러가 머리 위를 지난다 그때 불 꺼진 아랫동네는
물감 한 방울이 떨어지기 전쯤의 세상
굼벵이가 우화를 꿈꿀 때마다 몇 번이나 속을 뒤집어도 녹슨 공장의 철문은 언제나 문을 열고
그 말 기억해? 어둠이 뭉치면 녹물 같은 갈빛이고 무채색은 칠하는 게 아니라고 했던 말
중력에 고개 숙인 아이들은 이제 무지개도 모를 텐데요 무채색은 누구의 그림자입니까
청룡 열차가 레인을 오갈 때마다 작업 라인을 오가는 사람들
일곱 빛깔은 아이들의 몫이었는데 해피엔딩은 꿈이었구나 흑백의 그늘이 혼잣말을 하고
바닥이 온통 회색일 때마다 아이들은 또 양떼처럼 몰려갈 텐데요
누가 알까, 그림자를 칠하는 건 애벌레가 꾸는 꿈이라는 걸 먹구름을 보고도 하늘 높이 고개 드는 일인 걸, -월간 『모던포엠』 2024년 10월호 발표
최형만 시인 / 바람 몸살
유리컵이 예뻐서 작은 화분을 샀다 주인은 바람 한 점 없어도 잘 자랄 거라고 했다
물을 줄 때마다 움트는 꿈들
그런 날엔 지하에서도 열심히 기도했다 받침대에 물이 넘치는 날이면 미로 같은 길을 흘러온 나 나는 언제나 그런 식물의 체위가 궁금했는데
작고 가벼운 씨앗은 어떻게 자랍니까?
바닥이 마를 때면 나도 따라 몸살을 앓았다 씨앗이 없어도 꽃 피우는 벽지들 낡은 무늬가 바람을 들일 때면
풍경은 오래전에 보았던 바깥을 닮았다 낮은 곳에 사는 것들은 종종 나와 맞서길 좋아하고 절반의 햇빛에도 그늘을 찾아다녔다
구석진 벽에서도 잘 자라는 먹구름처럼 그게 그들의 재능일 테지 반지하는 바람이 없어도 자꾸만 흔들렸고
그때마다 나는 몸살을 앓는다 그것참, 이상하다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잠깐 다녀간 졸음에도 기분은 좋아지고
바람 한 점 없이도 잘 자라는 땅속 같은 집
어디서 들어본 이야기 같은
-계간 『아토포스』 2024 여름호 발표
최형만 시인 / 나의 기원
갈대가 키워낸 바람은 지구를 몇 바퀴나 돌고서야 돌아왔다
움켜쥐지 않아서 가벼운 몸이 슬쩍 빈자리를 엿본다
공중에 집을 짓던 거미가 먹구름을 살필 때마다 바닥부터 쓸어가는 바람
지상에 깃털을 떨구는 것들은 떠도는 혈통이라서
풍향이 바뀌면 새들이 먼저 날아올랐다
구멍 숭숭한 잎에게 길을 물으면 거미줄 사이로도 바람은 각을 세웠다지 현을 켜듯 계절을 조율했다지 뿌리를 흔들다 우듬지까지 내달렸다지
웅덩이에 달그림자 내고서야 바람은 빗장을 걸었을까
지구 반대쪽에서 길을 물으면 그늘의 힘으로 오는 것
그림자 없이도 자꾸만 흔들리는 게 있다
그런 날엔 내 안에도 몇 개의 바람이 자랐을 것이다
갈대가 키워낸 바람은 돌아와 밤새 몸살을 앓았을 것이다 -계간 『문학춘추』 여름호 발표
최형만 시인 / 끝물, 아포리아*
허방에 빠진 날을 기억해요 헤어나려는 몸부림에도 조용히 미끄러지고 떨림에 순해지는 나는
이제 바닥 같은 그런 말을 알아요
‘끝’이라는 말을 발견했을 때부터 정말 끝으로 밀려난 적 있습니다
막다른 길에 들어선 꿈도 끝물 같았죠 어룽대는 그림자에 눈뜰 때까지 끌려가는 막판처럼, 그러니까 나는 굶주린 짐승이 되거나 길들 수밖에요
길을 잃을 때마다 돌아올 배후처럼 없는 길을 그려왔어요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인사하다가
웅성거리며 기도하는 사람들 울리지 않는 교회의 종소리를 생각하면서 내게 남은 지문을 더듬어봐요, 그건
뭍에 오른 물고기처럼 숨이 차는 일
간단히 말할 수 없는 날이 있습니다
혼자인 나는 목격자가 없어 끝물일까요 바람벽도 없이 들썩이는 밤마다 파닥이는 아가미 다 떼어내고 비린내 나는 그런 밤으로
조용히 밀려났다 돌아온 적 있습니다
저마다의 이유로 침묵하는 동안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바닥을 배운 나는
모르는 길도 잘 아는 것처럼 이제 뭐든지 척척
용감하게 혼자 걸어가는 이 세계가 조금씩 좋아지려고 해요
*사물에 관하여 해결의 방도를 찾을 수 없는 난관이나 논리적 난점 -계간 『아토포스』 2024 여름호 발표
최형만 시인 / 감정의 심리학 예술 영화를 보는 것은 나의 유일한 취미, 가을 하늘처럼 맑게 해석되는 날에도 나는 밤을 더듬다가 자주 깼다 이유 없는 밤의 눈물은 이렇게 무거운 거구나
정수리가 뜨거운 낮에는 창가에서 휘파람을 불었다 판타지 같기도 했던 주인공의 방
그럴 때면 내 방의 천장도 기울어갔다 모서리에서 몇 장씩 겹쳐오는 장면들, 뒷면에 깃든 생각을 밀어내다 접힌 마음처럼
사납게 돌아서는 극적인 감정
믿을 수 없는 것을 볼 때마다 믿고 싶은 것이 많은 나는 신앙을 붙들었다 마음대로 생각한 믿음은 그동안 얼마나 따뜻했나, 스크린에 펼쳐진 시간은 그저 풍경이라는 걸 안다
밖이 환할수록 이해하기 힘든 밤의 감정은 달아나려 하고
갈 수 없는 국경마다 바람을 타고 가는 사람들, 지도를 펼쳐 운명을 점칠 때마다 지나간 감정은 주인이 없다
무너진 그늘은 어디서든 깨어나고 불타는 숲으로 들어가면 더 큰 숲이 누워있다
같은 자리에서 밤낮이 바뀌는 것처럼 바깥이 안쪽을 보고 있다 이제 대낮에도 나는 자꾸만 잠이 온다 그것은 영화를 보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계간 『문학의 오늘』 2024년 여름호 발표
최형만 시인 / 소문에 못질하기
모서리가 톱밥을 흘릴 때였다
허공을 떠도는 말은 아귀가 맞지 않은 틈처럼 자랐다 꺾쇠의 자세보다 깊어진 옹이들
먹선이 지워질 때마다 맞춤 제작으로 소문난 목공소에도 사람들이 떠나갔다 귀로 몰려간 뒷말이 마지막 인사처럼 길어질 때면 숭숭하게 불어오는 휘파람 에도 헛것들이 몰려간다는 소문이다
이제는 녹슨 이야기만 남은 곳
한쪽으로 부는 바람도 허밍으로 들썩이는 화술 같았다
꽃가루 같은 말은 어디까지 날아갔을까 심지 굳은 목수의 대패질은 달아난 말을 두껍게 깎을 뿐이다 장도리를 든 팔뚝에 힘줄이 돋는 동안 웃자란 말에 못을 박는 오후
통째로 날아간 말은 꽃이 되지 못했다
구부러진 대못 사이로 누런 잇몸만 기웃거렸다 -웹진 『문장』 2024년 10월호 발표
최형만 시인 / 알비노*
빛을 본 적 없는 이들의 텅 빈 거리는, 마른 종이 같다 해질녘 길에서 엎드린 사람은 하얀 얼굴로 꿈을 꾼다지 바람이 숨죽여 우는 것처럼 엎질러진 노을의 흔한 표정도 없이 저녁도 하얗게 지는 거라지 빛의 소란을 평정하는 백색의 밤 통증으로 휘어진 길목마다 몽롱한 회색빛 언어가 따라왔다 불면은 몸의 바깥이어서 색을 찾아가는 혈류에 잠기면 먹구름도 무지개를 그릴 텐데, 뜨겁게 타오른 바람이 굴절되고 있다 한 떼의 컬러가 증발할 때마다 멘델이 나누는 우열의 방식은 멜라닌 색소로 흘러드는 새하얀 비명들 그늘로 가는 누군가를 보면 투명한 홍채로 걸어간 순례처럼 바짝 끌어당긴 어둠을 안고 있다 붉어지는 방향으로 몸을 트는 동안 진짜 꿈을 꾸고 싶은 사람들 작은 온기에도 날마다 타고 있다 *유색 동물에서 날 때부터 피부나 머리카락, 눈 따위의 멜라닌 색소가 없거나 모자라는 것 -2024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최형만 시인 / 손의 서술
초록색 각반으로 바짓단을 여민 손이 이 빠진 안전화 지퍼를 살핀다 아침 햇발 속에서 더 반짝이는 쇳가루, 이럴 땐 아마존에 있다는 엘도라도가 떠오른다
우둘투둘한 쇳덩이를 품을 때마다 볕을 튀기듯 쏟아내는 금빛 흘림체, 그라인더의 굉음이 손을 지날 때마다 은빛 여우의 털에서 날법한 쇠 비린내가 났다
날아든 쇠먼지에 고개 돌려도 능숙하게 칼질하는 바람의 화술은 손의 일생을 아는 걸까 바람은 밤이 깊어서야 베인 손금을 털어냈다
자면서도 별빛을 튀기는지 주먹을 쥐고 새벽이면 별똥별을 더듬던 손, 손에도 관성이란 게 있다면 나의 태생은 허공을 움켜쥔 모습일 게다
달궈진 손이 남은 손을 부축하는 동안 한 뼘씩 줄어드는 공중의 계절
발품을 다 팔 때까지 손품은 그치지 않고 손이 손을 깎은 날에는 그늘을 삼킨 다른 빈손이 왔다 이제는 손이 다 떠나간 자리, 바람이 불 때마다 오래된 탄내가 났다
그럴 때면 빈손에서도 쇳내가 난다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4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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