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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명옥 시인(화가) / 꿈꾸는 달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29.

김명옥 시인(화가) / 꿈꾸는 달

 

 

우리가 어느 길에서

다시 만났을 때

달의 이마를 바라보면

촛불을 들지 않아도 서로 환한 우리

 

혼자 서기 힘든 이들에게

쉽게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 찾아와 줄 때

벗어버린  날들이 깃털처럼 날아가고  

 

겨울 저녁

당신을 부르는 내 노래의

마지막 소절이 흩어질 때

365개의 가파른 계단을

내려온 달빛이

생의 트로피를 어루만지면

꽃을 저버린 나뭇가지에 환하게 내리는 첫눈

 

-시집 『꽃 진 자리에 꽃은 피고』에서

 

 


 

 

김명옥 시인(화가) / 푹푹 쪄야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도 않지만

모든 사람이 나를 싫어하지도 않았지

가마솥처럼 푹푹 쪄야

연꽃향이 짙어지고

푹푹 쪄야  

때에 절은 나도

사람냄새 날텐데

 

지구별 문법

아직도 서툴러

갇혀만 지냈던 영혼

더위에 못 이겨

잠금장치를 풀고 나올 때

 

배롱나무 꽃 붉게 달아오르고

덩달아 나도 붉게 달아오른다

 

 


 

 

김명옥 시인(화가) / 꿈꾸는 달

 

 

우리가 어느 길에서 다시 만날 때

달의 이마를 바라보면

촛불을 들지 않아도 서로 환하다

혼자 서기 힘든 이들에게

쉽게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 찾아와 줄 때

무례한 날들이 깃털처럼 날아간다

겨울 저녁 당신을 부르는

내 노래의 마지막 소절은 흩어지고

365개의 계단을 내려온 달빛

허물어진 불안의 등을 쓸어내리면

꽃이 떠난 나뭇가지에 환하게 내리는

첫눈

 

 


 

 

김명옥 시인(화가) / 토굴 가는 길

 

 

눈물 마른 뼈들을 끌고

멀미로 휘청이는 시린 발로 가는 길

알면 알수록 모르겠는 것들

보면 볼수록 보이는 않는 것들과 작별하고

뒤돌아서면

저만치 얼어붙은 불빛 아래

나무 물고기 끙끙 앓는 소리 쌓이는데

수북한 미련들을

아궁이에 던지고

눈사람 부둥켜안고 겨울잠이나 청해 볼까

늘 술래였던

나무들의 발자국에 새살이 돋을 때까지

 

 


 

 

김명옥 시인(화가) / 자화상

 

 

거울 속에서

아버지 걸어 나오신다

건천(乾川)이 이마를 흐르고

뺑코에 곱슬한 머리카락

 

수건으로 물기 닦고 다시 보니

깊은 눈가 토타운 입매

도드라진 광대

보고 싶은 엄마 얼굴

 

바짝 다가가서

한 겹 한 겹 벗겨내니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

유전자의 무덤이었네

 

통곡하는 그 무덤

달래줄 사람 없네

 

-시집 <꽃 진 자리에 꽃은 피고>

 

 


 

 

김명옥 시인(화가) / 메리골드 씨앗을 받으며

 

 

묶었던 머리카락 풀어 빗질하는 저녁

바람에 취한 시간의 비늘들이 말라가는데

그리 살지지 않았던 꽃밭

독을 숨겼거나 약을 숨겼거나

잡고 싶었던 손 놓쳐도 그뿐

어차피 모두 지고 말 뿐인데

누가 부러뜨렸을까

늙은 꽃대 어루만지며

충혈된 눈 비벼봐도

찾을 수 없는 서글픈 성감대

병든 개가 제 발을 하염없이 핥듯

제 상처 외에는 아무것도 아프지 않았었지

그래서 씨앗들은 이승을 훌훌 떠나 보는 것일까

 

깡마른 손으로 머리핀을 꽂고

나는 왜 꽃밭을 떠나지 못하는지

 

 


 

김명옥 시인(화가)

2015년 《불교문예》를 통해 등단. 서양화가. 시집 『꽃 진 자리에 꽃은 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