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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곽인숙 시인 / 능내역에서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29.

곽인숙 시인 / 능내역에서

 

 산으로 둘러싸인 우리 동네, 그리운 사람보다 어둠이 빨리 도착합니다

 

 오백 년 보호수를 바라보면 멀어진 시간이 하나로 모이듯 내川를 이룬 물길도 은하에 닿습니다

 

 유실된 내 기억을 좇아 하루치의 생각을 갈무리하는 익숙한 풍경을 벗 삼아 능내에 젖고 있습니다

 

 마음의 길은 갈등을 벗어났을까요

 

 마음의 갈등에서 길을 찾았을까요

 

 모른 척 무임승차해도 마음이 닿는 쪽으로 기차는 떠납니다

 

 능내역에서 배웅의 형식은, 언제나 운길산에서 시작해 남해바다로 맺습니다

 

 적막보다 깊은 능내역에서 호젓한 이정표가 되어 서 있습니다

 

*능내역: 남양주시 조안면에 있는 능내역은 1956년 중앙선 철도가 정비되면서 능내역이 신설됐지만 2008년에 폐역이 됐다.

 

 


 

 

곽인숙 시인 / 꽃분홍 신발처럼 왔다

 

 

감나무 위의 까치집이 겨울을

견디고 있다

까치는 간데없고 바람 소리

소란했다

지난봄은 언제 왔었는지

연둣빛 꽃 편지가 희고 붉고 노랑 옷으로

세상을 밝히는데

나비가 물어 나른 햇살은

꽃샘추위 속에서도

붉은 동백

꽃봉오리를 피우며

처마 밑으로 봄이 날아오르기를 기다렸다

이번 봄은,

댓돌에 놓인 꽃분홍

신발같이 왔다

 

 


 

 

곽인숙 시인 / 떼창이 완성되다

 

 

가을 문턱에 들어서자

여기저기 시끌벅적하다

 

잡풀 주섬주섬 옷깃을 여미며

바람결에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무소 떼처럼

먹구름이 몰려들어

소나기를 퍼붓는다

 

비 그치자

수백 마리 참새가

푸른 하늘 높이 군무를 한다

 

남해의 갯내음을 몰고 멸치가 배달되었다

 

양파는 자를수록

눈 콧물 쏟아져

나는 도마에 무수한

칼자국을 남긴다

 

아직은 할 말이 많다고

뚝배기 속에서

와글와글 국물의 목소리가 크다

 

허기의 아픈 고요가

금빛 노을 한 무더기로 끓는다

 

문득 낯선 낭만이

차오르는 달 하나를 노래하는데

 

시간의 붉음 밖으로

가을은 떼창으로 완성된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12월호 발표​

 

 


 

곽인숙 시인

경남 남해 출생. 『시와 편견』 등단. 시집 『동심원 연가』 『남해로 가는 능내역 기적소리』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신정문학전체대상, 안정복문학상, 한국시인협회 특별상, 미래시학 신인상, 남명문학상 수상. (주)일양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