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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장성호 시인(서울) / 어떤 주검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30.

장성호 시인(서울) / 어떤 주검

 

 

우면산 질퍽한 황톳길 오른다

어떤 나무 한 그루

죽은 소처럼 쓰러져 있다

그날의 붉은 울음소리 아직도

그곳에 소리의 뼈로 박혀 있다

깊게 팬 나무껍질

검은 핏빛이다

숨죽이고 다가가

가만히 손을 대본다

물컹, 손바닥이 흥건하다

그간 뜨거운 눈길 한 번

따스한 손길 한 번

다정한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했다

길가 벤치에 모로 누운

덥수룩한 한 보헤미안

비에 온몸 흠뻑 젖어 있다

그날의 밭은 기침소리 아직도

그곳에 소리의 뼈로 박혀 있다

땟물 진 겉옷

검은 핏빛이다

 

 


 

 

장성호 시인(서울) / 나무들의 무덤

 

 

우면산 중턱마다 터 잡은

푸석푸석한 통나무들

장작더미처럼 켜 켜이 쌓여

수 년째 동행하고 있다

길 잃은 작은 날짐승만

잠시 머물다 가는 그곳

바람 소리만 아득히 들려온다

비쩍 마른 살과 뼈들이

바람과 함께 사그라지고 있다

죽어가면서도 낯선 이방인들

서로 부둥켜안고 동행하고 있다

지난 숱한 나날들

슬픔과 기쁨의 소용돌이

바람 소리에 오롯이 담아낸다

저기 푹 썩은 나무들

밑바닥 무너지는 소리의 뼈

붉은 황토 속 깊이박힌다

이 먹먹한 봄날 나도

낯선 이방인들과 정처없이

동행하고 싶다

 

 


 

 

장성호 시인(서울) / 늙은 고래

 

 

눈발 날리는 겨울 바다

먼바다에서 섬마을 해안가로

떠 내려온 흰수염고래 한 마리

가쁜 숨 내쉬고 있다

마을 사람들 전설을 이야기한다

수렁에 빠진 친구 구하려다가

잃어버린 가족 찾다가

길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먼바다로 다시 밀쳐 보내진다

이튿날 온몸 깊은 상처 입은 채

또다시 그 자리에 밀려온다

숨소리 가늘게 들려온다

푸른 바다가 붉게 물든다

섬마을에 북소리 쿵쿵 울린다

눈 시린 백사장에 살 뼈 기름

산더미처럼 발라 놓고

마을 축제가 벌어진다

역대합실 긴 의자에 모로 누워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보던

어느 늙은 고래 한 마리,

심장에 작살 박힌 것처럼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장성호 시인(서울) / 시간의 강물

 

 

  지인이 밤새 먼 곳 떠나자 나만의 지도 펴본다

  홀로 고독한 길 들어서서 타인들과 부대끼며 살다가 저 너머로 사라져가는 한 남자의 그림자 추억한다 그 길은 손목까지 쭉 나 있고 도중 수많은 갈림길 만난다 기쁨과 슬픔의 소용돌이, 도래할 그날의 풍경 오롯이 떠올리며 손금 힘껏 늘려보지만 금방, 원래의 길로 되돌아가고 만다

 

  어느 일요일 정오, 궁전 같은 투명 유리방에 불쑥 희끗희끗한 머리 내밀자 붉은 손길로 인도되어 안락의자에 눈 감고 앉는다 한참동안 말이 없다 그녀는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남자의 머릿속 깊이 꿰뚫고 있다 사각거리는 쇳소리 잠잠해지자 긴 침묵의 강이 쩍 갈라진다 십여 년째 내 머리의 역사 빽빽이 써 내려가는 저기 단골 헤어디자이너 김, 그날도 시곗바늘 되돌릴 의향 없는지 묻고 또 물었다

 

  나이 들면서 아랫배만 볼록해진다

아이 밴 어머니 배처럼 배꼽 옴폭 들어가 있다 느린 팔자걸음으로 걷는다 배 아파 낳은 그 자식도 어느새 배가 부어 오른다 중년 배 두드리는 저기 뱃심 좋은 김 씨, 욕실 거울을 보다가 아랫배에 힘을 주어 힘껏 안으로 당겨보지만 이내 원래대로 되돌아간다

 

  그해 가을밤, 하문으로 붉은 피 쏟으신 할머니는 마른 장작처럼 누워계셨다 시루떡에 올라탄 돼지머리 신물 나게 웃고 있었다 푸릇한 소나무 가지를 흔들며 신들린 경문 외던 무녀는 쿵기덕 쿵 더러러러 노래 부르며 칼춤을 추었다 마을 잔치 한마당 같았다 뼈만 남은 할머니는 벌떡 일어나 붉게 물든 속바지 입은 채 덩실덩실 어깨춤 추셨다 구경 나온 동네 사람들 신명나게 한데 어울려 어깨춤 추었다 덩기덕 쿵 더러러러 쿵기덕 쿵 더러러러 이튿날, 할머니는 저 멀리 떠나셨다

 

 


 

 

장성호 시인(서울) / 삼각산에서

 

 

우이동 도선사에서 백운대 길

구불구불 바위산 넘고 넘어

외길에서 맞닥뜨린 뱀 두 마리

백운대 뱀이 굵은 동아줄 감고

미끌미끌 내려온다

밑에서 도사린 도선사 뱀

목이 빠지라 기다리고 있다

꼬리가 한없이 길어지면

백운대 뱀은 자신의 꼬리를 자른다

도선사 뱀은 머리 숙여 합장을 한다

뱀들 간의 살가운 우정이다

용암문 지나 위문에 당도한다

잠시 쉬어가는 뱀 꼬리들

나이 직업 고향도 묻지 않고

제 뱃속까지 모두 다 내어준다

허물 벗은 뱀처럼

온몸이 끝없이 가벼워진다

봄날, 삼각산 능선마다

꼬리에 꼬리를 문 이방인들

숨이 턱턱 막히는 소리 들린다

붉은 뱀꽃이 진다

붉은 뱀꽃이 지는가, 그래

 

 


 

 

장성호 시인(서울) / 시리다

 

 

  늘푸른나무 그늘 우면산 약수터 가는 돌담길, 푸른 이끼 떼가 용 그림 벽화 그리고 있다 배다른 돌끼리 서로 살을 맞대고 산더미 같은 흙 무게 견뎌냈다 반복되는 비바람의 세기 이겨내지 못하고 돌 뿌리 앙상하게 드러나도록 각진 모서리 살이 문드러져 있다

 

  밤마다 계곡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에 치를 떨며 홀로 날밤 새웠을 게다 돌봐주는 이 하나 없이, 돌 하나 둘?덜렁 빠져나간 그곳, 폐가 돌담같이 황토 물 깊게 배어 있다 머지않아 아무도 찾지 않는 이름 모를 돌무덤 세워지고 이방인들 잠시 머무르게 될 게다

 

  다시금 이가 시리다

 

  첫새벽 양재역 버스 정류장 근처, 질퍽한 모래 두부 걷어내고 퍼즐 조각 맞춰나가는 흰 머리에 수건 동여맨 김 씨, 한평생 한 우물 파며 빈틈없이 빡빡하게 살아와 각진 모서리끼리 서로 부딪혀 푸석푸석한 상처만 남기기도 하였다 때로 법 없이 살 정도로 물렁물렁하게 살아와 장대비에도 서로 뱃속 밑바닥까지 뒤집히기도 하였다

 

  이제, 머릿수건 다시 동여매고 목장갑 소매 다시 고쳐맨다 사부작사부작 숨 쉬는 틈 줘가며 보도블록 한장 한장 내려놓고 있다 울컥, 내 콧등이 시리다

 

 


 

장성호 시인

1958년 서울 출생. 서울시립대 토목공학과와 서울대 행정대학원. 2005년 <시와 창작>으로 등단. 현재 건설교통부 공항개발팀장으로 재직 중. 첫 시집 <가을겨울봄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