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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화윤 시인 / 우수(雨水)한 성적표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31.

이화윤 시인 / 우수(雨水)한 성적표

 

 

수은주가 52도까지 급상승하자

단숨에 거리가 주방으로 돌변했다

행인들은 저마다 뭔가를 깨뜨려 맨홀 위에다 올렸고

커다랗고 둥근 무쇠들은 충성스럽게 제 몸을 불살랐다

여름이면 아스팔트 위 맨홀들은 성수기를 맞았는데

그것들은 달걀프라이 메뉴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갑자기 멱살 잡혀 밖으로 끌려 나온 무수한 계란들은

모국어보다 능통해져 갔다

달걀은, 점점 익어가는 한 알의 지구

아마존에서 스발바르까지 모든 대륙은

단숨에 완숙을 꿈꾸며 한발 앞서 뜨겁게 내달렸다

렌지를 켜지 않아도, 이것은 매우 신속하고 빠른 조리법

수시로 분노 게이지가 상승하던 엄마의 갱년기도

대왕 프라이팬 앞에서는 맞수가 되지 못했다

피자도 파이도 에그도 글로벌한 대왕 프라이팬이 제격이었다

아스팔트 맨홀에 붕어빵 반죽을 넉넉히 부으면

치지직- 시원한 빗소리를 내며

고소하게 익어가는 우리들의 ASMR,

무엇이 우수한 것인지는 몰라도

맨홀뚜껑 위에서 잘 익은 반죽을 와플처럼 뒤집으면

우수(雨水)하다는 성적표가 곳곳에서 격자무늬로

아주 자랑스럽게 찍혀 나오곤 했다

1.5℃ 상승에 붉게 방점을 찍은 한 알의 거대한 지구

스톱 버튼은, 그새 누가 떼어먹었는지

꼬리 잘린 붕어빵처럼 흔적도 없었다

 

우린 너무도 원 킬을 좋아해서

계란 한 판, 와플 10인 분, 붕어빵 20마리

그들의 바글거리는 가족사쯤 단번에 숨통 끊어줄

고성능 살상무기,

커다란 맨홀뚜껑 프라이팬 개발에 드디어 성공했다

 

 


 

 

이화윤 시인 / 별빛, 미드나이트 블루

들판에

고흐의 이젤이 보이지 않아도 괜찮아요

삼각대에 수줍게 기댄 고백쯤 없으면 어때요

눈부신 태양,

해바라기 사이로 걸어보는 거예요 걷다가 혹시

달빛 한 모금 필요한 적 없었나요

햇살 아래에서 문득 두 눈 감으면

대낮에도 다시마보다 짙은 어둠 환히 열리죠

수중 바위 밑에서 별이 뜨는 마라도에서는

두 눈을 꼭 감아 주세요

누구도 건너가지 않은 태초의 밤하늘이 그곳에 서식하죠

 

지느러미 달린 별빛은 3억 6천만 년 전 진화를 멈춘 실러캔스

바닷가에 서면,

당신의 발가락에도 지느러미가 돋아나요

캄캄한 해저에서 커다란 화석이 헤엄치는 것을

당신은 믿어야 할 시간, 새벽별 뜨는 푸른 밤

한 마리 거대한 별빛,

수중을 꼬리에 묶고 리본처럼 끌고 다닐 때

사이프러스 나무가 없어도 이제 두 눈을 뜨세요

 

죽음처럼 빛이 들지 않는 해저에서

꼬리지느러미 달린 밤하늘이 이리저리 헤엄쳐요

머나먼 곳, 고흐의 별들 걸어 나오는 새벽

휘익- 회전하다 재빨리 수중을 가르는 푸른 밤 한 마리,

 

검푸른 몸으로 거대한 아가미를 뻐끔거리죠

 

오늘 당신 꿈속에 별이 뜨지 않아서

 

온몸에 눈부신 별을 붙인 실러캔스,

고흐의 캔버스처럼

물속 밤하늘이 되어가는 거죠

 

-제3회 문학뉴스 & 시산맥 기후환경 신인상

 

 


 

 

이화윤 시인 / 사각 저쪽으로 피는 것들

 

 

 늙은 염부가 밀대로 구름을 읽느라 분주했다

 가끔은 먹구름의 두터운 모의에

 어린 소금물은 재빨리 은신처로 얼굴을 숨겼다

 

 몇 해 전 내려온 젊은 염부와

 너무 일찍 엄마가 녹아 버린 딸의 젖은 동요 속으로

 언제쯤 햇살이 들까

 어린 노래를 앞에 앉히고, 그는 생전의 아이 엄마가 좋아했던

 꽃무늬 빗으로 축축한 시간을 곱게 빗었다

 

 (아빠, 엄마도 나처럼 예뻤어요)

 (그럼…… 참 예뻤었지……)

 (엄마가 하늘로 가서 자꾸만 젖은 노래가 찾아와요 나는 언제쯤 아빠처럼 커다란 창문이 될까요)

 

 순간 목에 걸린 대답이 젖은 소금 알갱이처럼 쏟아져 내렸다

 20kg씩 자루에 담긴 쓸모들,

 그의 심장에 뭉친 멍울들은 언제쯤 제맛을 내는 꽃이 될까

 바람이 분다

 곰소염전에선, 몇 줌 눈물도 햇살에 사나흘 잘 말리면

 반짝이는 사각형이 되곤 했다

 

 인부들 땀 흘리는, 늦은 아침

 혼자 깨어난 아이가 컨테이너 안에서 모닝콜처럼 노래를 불렀다

 

 (*아기상어 뚜루뚜루~귀여운 뚜루뚜루~ 엄마상어 뚜루뚜루~……)

 

 그날 곰소는,

 물기 밴 눈으로 먼 바다만 종일 바라보았고

 저녁상 물린 후에도 먼 데서 밤새가 혼자오래 울었다

 

*아기상어: 바닷속 상어 가족을 주제로 한 더 핑크퐁 컴퍼니의 동요

 

-웹진 『시인광장』 2024년 12월호 발표

 

 


 

 

이화윤 시인 / 사각 저쪽으로 피는 것들

 

 

 늙은 염부가 밀대로 구름을 읽느라 분주했다

 가끔은 먹구름의 두터운 모의에

 어린 소금물은 재빨리 은신처로 얼굴을 숨겼다

 

 몇 해 전 내려온 젊은 염부와

 너무 일찍 엄마가 녹아 버린 딸의 젖은 동요 속으로

 언제쯤 햇살이 들까

 어린 노래를 앞에 앉히고, 그는 생전의 아이 엄마가 좋아했던

 꽃무늬 빗으로 축축한 시간을 곱게 빗었다

 

 (아빠, 엄마도 나처럼 예뻤어요)

 (그럼…… 참 예뻤었지……)

 (엄마가 하늘로 가서 자꾸만 젖은 노래가 찾아와요 나는 언제쯤 아빠처럼 커다란 창문이 될까요)

 

 순간 목에 걸린 대답이 젖은 소금 알갱이처럼 쏟아져 내렸다

 20kg씩 자루에 담긴 쓸모들,

 그의 심장에 뭉친 멍울들은 언제쯤 제맛을 내는 꽃이 될까

 바람이 분다

 곰소염전에선, 몇 줌 눈물도 햇살에 사나흘 잘 말리면

 반짝이는 사각형이 되곤 했다

 

 인부들 땀 흘리는, 늦은 아침

 혼자 깨어난 아이가 컨테이너 안에서 모닝콜처럼 노래를 불렀다

 

 (*아기상어 뚜루뚜루~귀여운 뚜루뚜루~ 엄마상어 뚜루뚜루~……)

 

 그날 곰소는,

 물기 밴 눈으로 먼 바다만 종일 바라보았고

 저녁상 물린 후에도 먼 데서 밤새가 혼자오래 울었다

 

*아기상어: 바닷속 상어 가족을 주제로 한 더 핑크퐁 컴퍼니의 동요

 

-웹진 『시인광장』 2024년 12월호 발표

 

 


 

이화윤 시인

1965년 경북 칠곡 출생.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졸업(불어불문학과). 전, 가톨릭 선교사. 2024년 계간 《시산맥》 등단. 제3회 문학뉴스 & 시산맥 기후환경문학상 신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