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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백형 시인 / 똥살개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31.

김백형 시인 / 똥살개

 

 

 육성회비도 못 낸 놈이 뒤가 급하다 손 들 수도 없는 노릇

 

 움켜쥔 뱃병이 터져 버린 1교시, 하춘화처럼 눈이 큰 선생님은 코를 틀어쥐며 교무실로 내빼고 민방위훈련인양 우르를 복도로 빠져나간 아이들은 교실 안을 구경하고, 근엄하신 각하 옆 스피커에선 이학년 칠반 김태희 어린이가 바지에 똥 쌌으니 오한년 이반 김진희 어린이는 얼른 오라 연속 두 번이나 전교 방송을 하고

 

 옆 반 아이들까지 똥살개 똥살개, 그 똥살개 목줄 잡고 엄마는 아침마다 교문 앞에서 실랑이하고

 

 그 시절 다시 온다면 똥살개는 일부러 뱃병이 도져 교실이고 교무실이고 교탁이건 교문이건 각하 사진 옆 스키커에까지 설사똥을 우레로 싸지르고 말 거다 왈왈왈

 

 


 

 

김백형 시인 / 눈많은그늘나비*

 

 

직벽을 더듬던 더듬이가 자꾸 미끄러졌다

 

여름은 대체 어디서 기진하였나

 

*나비목 뱀눈나빗과. 여름철 그늘진 숲 가장자리에서 주로 활동한다. 날개에는 다섯 개씩의 검은 눈알 모양의 무늬가 있다.

-시집 『귤』에서

 

 


 

 

김백형 시인 / 그릇

 

늦되는 자식이 안쓰러워 어머니는 날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 했다

동생과 다툴 때면 큰 그릇이 작은 그릇을 품어야 할 것 아니냐 하시던 아버지

변변치 못한 형편에 겨우 추렴을 했는데도 친구들은 그릇이 작다 수군거렸다

제 밥그릇도 못 챙기면서

기일이면 철석같이 숟가락을 꽂는 나는 평생 그릇 되었다

 

 


 

 

김백형 시인 / 손가락을 위로하다

 

 

내 손가락이 가장 행복해하는 일은

시집의 책장을 넘기는 일, 그건

탈지면 같은 구름 뜯어다

짓무른 상처를 닦아내는 일

돈 세는 호강이야 못 누려보지만

돈독 오를 일 없으니 안심이야

 

밤마다 내 손가락은 푸른 대숲에 들지

끝내 속이 비워지질 않고

세 치 아래 성장판까지 닫혀

한 치도 웃자라지 못한 채 깨곤 하지

 

꿈결 파문 그치지 않는 그 손가락으로

생마늘을 까고 멸치 똥을 빼고

끼니마다 풀풀 냄새 가실 날이 없네

 

어제는 사라진 지문 재확인시켜가며

동사무소 마감 시간 인감증명 떼랴

은행대출 붉은 지장 수없이 날인하랴

무진장 애를 썼지

 

내게 제일 먼저 숫자 세는 법을 가르쳐준 이

가위바위보 승패를 가장 먼저 겪게 한

그 손가락에 반지 한 번 껴준 일 없이

깎지 끼고 달래며 세상을 살아왔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깨물면 다 아픈 열 손가락

합장으로 기도해주는 것

 

그리고 지금처럼 인터넷뉴스 앞에 앉아

북미핵전쟁을 우려하며

삐져나온 코털이나 뽑아달라는 것

 

― 계간 시 전문지 『포지션』, Vol 020, 2017년 겨울호

 

 


 

 

김백형 시인 / 방아깨비

 

 

 오수에 눈 떠 보니 방아깨비네 대체 나는 어디로 갔나? 펄쩍펄쩍 출렁출렁 풀들도 정신없었네 밤새 갈구하는 마른 목을 끝별들이 눈물로 축여 주었네 방울방울 비치는 이른 아침 제 얼굴에 깜짝 놀란 방아깨비 다시 풀쩍 뛰었네 풀잎 끝에 맺혀 있던 둥근 허상들 산산이 깨져 버렸네 꺾인 풀 허리춤 잡던 어미 등에 간신히 업혀 있던 새끼 깨비도 흔들리는 땅에 떨어져 버렸네 눈 떠 보니 예초기에 잘려 나간 풀들이었네 오늘 하루도 창공으로 날아갔다 핏빛 늘에 땅거미 몰고 오는 슬픈 초록의 시간 자라나는 무덤의 모발 상석 위에 달빛을 얹고 석주 위에 올라 먼 산 바라보는 긴 다리 무릎 접은 방아깨비

 

 


 

 

김백형 시인 / 광화문 바닥분수

 

 

광화문 광장 한복판 흑등고래 한 마리가 누워 있다

대리석 따개비를 붙이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다

폭염에 숨어 있던 시민들 고래를 구경하러 모여들었다

저것 봐봐 오대양물을 잔뜩 채우고 있나봐

타들어가는 허공에 쭉쭉 물줄기를 쏘고 있잖아

신이 난 아이들은 고래 등을 뛰어다니고

철퍽철퍽 물장구를 칠 동안

16차선 도로는 굽이치며 흘러간다

펄펄 끓는 태양 벗지 못한 갑옷 속에서

세상굽어보던 이순신 장군은

살 것 같다 살 것 같다 숨통을 트고

바다로 떠나지 못한 광화문 통째로 실어

출항을 준비한다

컨테이너 빌딩들 선적할 동안

티셔츠 젖은 연인들 포옹을 하고

넥타이 푼 아빠들은 구두를 벗어놓고

애엄마 웃음 따라 물 만난 고기들을 쫓는데

허공도 무지개를 걸어놓고 발라당 누워

어스름 땅거미를 기다린다

산호초 같은 남산 위로 물밀어올리는 밤바다

교차로 횡단보도를 정어리 떼처럼 건너는 회사원들

광화문은 그제야 물고기를 말려놓고

와이파이 데이터를 켜 세상 얘기에 귀 기울인다

정말? 눈 번쩍 뜨일 때마다 해파리 섬광처럼 별이 뜨고

쯧쯧 어떡하니, 머리가 한 짐 될 때 가로등이 부표처럼 둥둥 뜨고

그 사이 흑등고래 한 마리

지난한 오늘 하루를 유유히 빠져나간다

 

 


 

김백형 시인

1967년 서울 출생. 본명 김태희. 2017년 《문학의 오늘》로 등단. 2017년 제6회 오장환신인문학상 당선. 시집 『귤. 인문창작공간 <봄울지도> 운영. <12 더하기 시인>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