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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정연 시인 / 사회적 기술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5.

한정연 시인 / 사회적 기술

 

 

식탁에 둘러앉습니다

두 번의 여름을 지나 겨울에 모였으니

오랜만이죠 우리

 

그간의 왕성한 활동을 증거하는

화려한 차림새와 안색들입니다

새삼 얼굴로 쓸어봅니다

낭패로군요 그럴싸하게 웃고 싶은데

금방 울고 싶어집니다

식탐을 들키지 않으려고

자기 접시와 남의 접시를 비교하지만

결국 후회만 쌓입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

뭐라도 해야 합니다

옷깃에 튄 불편을 닦고

보기 좋은 근황이 되려면

 

우리라는 말이 말끝마다 달려도

우리 안의 짐승들처럼

서로 밟힐 수 있습니다

간혹 우리 밖 탈출에 성공한 경우도

대개의 비극적 결말로 인해

고려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라지는 일도 멸종하는 일도

우리의 소관 밖입니다

 

없는 듯 앉아 있습니다

난처한 질문에는 좀 더 미래 쪽으로

식사가 끝나도 할 말은 삼킵니다

따라 웃기 좋을 정도로만

홀짝 홀짝 웃습니다

죽을 맛인데 살맛나는 것처럼

배부른 표정으로 찻잔을 들어

자주 입을 가리는 이유는

세상에 대한 눈치 보기

 

언제나 내 앞에 푸짐하게 차려진

세상을 어쩔 수는 없으니까요*

 

* 자크 프레베르.

ㅡ『시인동네』(2019, 7월호)

 

 


 

한정연 시인

충남 천안 출생.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졸업. 2017년《현대시학》 신인상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