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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복 시인 / 황페한 기억에 대한 단상
영광도서 앞 나무 탁자에 무늬로 앉아 바라다본 대마호텔 층층이 창마다엔 화상처럼 불빛이 일그러져 빛나고 십 년의 세월을 견디어 지워지지 않는 그을린 기억이 붙박혀 있다. 그 겨울의 불씨가 건물 어딘가에 곰팡이처럼 숨었으리라는 예감. 서면로터리 돌아 동보극장 뒷골목에 즐비했던 학원들 오뎅 국물 잔소주에 취하던 나날의 검정고시생들은 한 번씩의 실패를 나누어 갖고 지금은 다시 어떤 실패를 준비하고 있을까? 열아홉의 노이로제는 만화가게 골방 질 나쁜 포르노 화면으로도, 송정 바닷가 언덕에 기댄 첫 담배의 어지럼증 으로도 잠재울 수 없었다. 동양고무 라인 조장이던 누이를 기다리던 당감동 고개에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조화도 없는 영구차가 화장터를 모르고, 자취방 쪽문으로 저녁 햇살이 꼬리를 사리면 66번 버스 안내양에게 부치지도 못할 편지를 썼다. 가죽 공장 다니던 도한이를 만나면 달에 한 번은 자갈치시장 좌판에 쪼그려 앉아 꼼장어를 씹었다. 그럴듯한 내일이 있기라도 한 것인 양 남폿불이 깜박이고 싸구려 포부를 떠벌이기에도 지치면 대선소주를 물컵에 따라 들 이켜곤 했다. 그 매서운 겨울이 다 가도록 불타는 호텔 창문에 매달렸던 창녀의 바람에 날린 치마 안 곱게 감추어 진 빨간 속옷을 지울 수 없었고, 밧줄 매듭이 풀리자 떨어져 즉사한 죽음의 기억이 종이컵 속에 커피 자국으로 묻 어 있다.
-시집 『어떤 청혼』 中에서. 실천문학, 1999년.
정기복 시인 / 단양마늘
여섯 쪽을 갈라 한쪽을 심어도 어김없이 육쪽이 되는 마늘
서리 내린 논밭에다 두엄 뿌려 갈아 묻고 짚덮어 겨울나면 봄 앞질러 언 땅 뚫고 듣는 새순
맵기는 살모사 같고 단단하기가 차돌같은 단양마늘
약값도 안 되고, 품값도 안 되는 것을 육순 노모 해마다 심는 정은 쪽 떼어 묻어도
육남매 살 붙어 열리기 때문일까 쪽쪽 떼어 뿌려도 어김없는 육쪽마늘
정기복 시인 / 버리지 못하는 게 희망뿐이랴
희망을 버리지 못해 여기 왔다 떼어버리지 못한 갈증을 소주잔에 저당잡힌 채 절망을 불러모았다
흉어의 바다를 딛고 정박한 배 하선을 서두른 선원 몇이 완월동 오촉 전구 아래서 폭풍의 품값을 탕진하도록 꺼질 듯 꺼질 듯 꺼지지 않는 남풋불이 항구의 세월을 그을렸다
부두를 헤집던 비린 바람이 습기 찬 손길로 달려드는 자정 절망을 포기하는 게 술값 치르는 것처럼 쉬운 계산이라면 또 모른다 주머니 속 구겨진 지폐를 꺼내놓듯 살아갈 길 다림질할 수 있다면.... 버리지 못하는 게 어디 희망뿐이랴
-시집 <어떤 청혼> 실천문학사
정기복 시인 / 백운대행 -진관사
한 점 가을 붉다. 저 불쏘시개 하나가 열흘 이내 온 산사를 불사를 것이다 진관사 계곡으로 비봉 오르다 척후병으로 와 불붙은 한 점 단풍 본다. 제 앞길에 놓인 능선의 숱한 잎들을 일제히 붉게 물들이던 산사람의 마음 깊은 골을 걷는다. 분홍이든 주황이든 누구의 손가락 마디 하나, 옷자락 한 뼘 적셔보지 못하였으나 언제인가 내 심장은 격발의 순간처럼 가쁘게 물든 때가 있었다. 젖어든 추억과 받아들인 기억 왼발 오른발 번갈아 디디면 어느덧 비봉과 향로봉의 갈림길이다. 가을빛 자연히 비추어드는 오늘 이왕이면 가파르고 험한 비탈길 택한다. 무심한 내 발길은 젖은 잎 한 장 말리지 못하나 한사코 벼랑에 매달리던 그대의 심사는 한닢 붉게 피워 온 산 불사른다.
—《신생》 여름호
정기복 시인 / 그리운 산동네 의풍리
담론이 끝나고 철문이 내려진 거리에 스산한 겨울이 어슬렁거리면 구겨진 전단 같은 퇴색한 잎들이 날리고 이제 나는 그리움의 수배자가 된다 그 많던 사람들 뿔뿔이 흩어져 어디로 갔나 지워진 얼굴들 대책 없이 호명하다가 가슴에 품었던 산동네 하나 끄집어낸다
살얼음 진창 밟으며 사람의 하늘 열던 동학군 깃들어 짚신 고쳐매던 그곳 그믐 가시밭길 봉화 치켜들고 새벽을 밝히던 산사람들 싸릿불 지펴 감자 굽던 그곳 비탈산 불 놓아 조며 수수며 메밀 갈던 생떼 같은 화전민들 목숨 부쳐먹던 그곳 그렇게 시절에 쫓긴 땅벌들이 더덕 뿌리 흙살 박아 물 차오르던 곳
암울에 지쳐 병이 된 이 계절에 산동네 의풍리 떠메고 와 만나는 사람마다 한 자락씩 떼어주고 싶다
-시집 <어떤 청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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